네가 다녀간 자리

모시대

by 정담훈



네가 다녀간 자리



이슬에 젖은 풀잎들이

고요한 바람을 품고

소리 없이 흔들리는 들판 끝

그곳에 모시대는 피었다


손바닥만 한 잎 사이로
하얗게 몸을 낮춘 채

다 핀 것도

덜 핀 것도 아닌 얼굴로


누구도 그 꽃을 보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저 미세한 떨림 속에
네가 다녀간 바람이 남아 있다는 걸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그날 너는 떠났고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모시대는 오늘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부서지지 않기 위해

얇고 단단한 줄기를 세운 채


너를 기다리는 뿌리처럼

이 들판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피어 있다



- 정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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