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담훈
–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이 감정은 단순한 짜증이나 불만이 아니다.
화란,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 내가 위협받고 있다, 내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감정이
말이 되지 못했을 때, 몸이 대신 터뜨리는 신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생존 본능에 가까운 ‘자기 보호 반응’이라 말하고,
고대 철학에서는 ‘존재의 위협에 대한 내면의 저항’으로 여겼다.
화는 억눌린 감정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해석받고 싶다는 몸부림이다.
운전대 앞, 그 순간에
깜빡이도 없이 끼어든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야, 미쳤나 진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욕이었지만,
사실은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소리였다.
불과 10초 전까진 창밖으로 흐르는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대던 나였는데,
그 짧은 순간에 감정이 뒤집혔다.
화는 그렇게, 예고 없이 튀어나온다.
화는 사건이 아니라, 쌓인 감정에서 터진다
그 차가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욕을 퍼부을 일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출근길에 놓친 지하철,
회의 중 억울하게 뒤집어쓴 실수,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카드값 알림.
작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하루를 관통하고 있었고,
그 차 한 대는 내 안에 있던 감정을 건드리는 마지막 실수였을 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터지는가
감정이 폭발하는 데는 과학적인 이유도 있다.
뇌의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하면 즉각적으로 경보를 울린다.
이성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은 잠시 꺼지고,
몸은 ‘전투 태세’로 돌입한다.
심장은 빨라지고,
호흡은 거칠어지며,
땀이 손바닥에 맺힌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생존 시스템의 작동이다.
화는, 내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신호로 작동하는 역설적인 감정이다.
철학자들은 화를 어떻게 봤을까
고대 철학자들은 화를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정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화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이유로,
적절한 방식으로 화내는 건 어렵다.”
노자는 덧붙였다.
“화를 참는 자가 도를 따르는 자다.
성냄은 타인을 태우기 전에,
반드시 자신을 먼저 태운다.”
화는 그래서
억눌러야 할 감정이 아니라,
조절해야 할 힘이다.
그날의 나는, 나에게 물었다
집에 돌아와
엔진을 끄고 핸들을 놓으며
나는 조용히 나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화가 났던 이유는,
그 차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실망했고,
내 인생이 이 방향이 맞는 건지
불안했다.
그 차는 그저,
내 감정이 머물 자리를 찾아낸 표적이었을 뿐이다.
화는 번역되지 않은 감정이다
화를 낸다는 건,
사실은 “지금 나 좀 봐줘”,
“나 지금 위태로워”라는 말을
너무 서툴게, 너무 세게 말한 것이다.
“왜 자꾸 끼어들어”라는 말 안에는
“내가 지금 흔들리고 있어”가 있고,
“진짜 짜증 나네”라는 말 속에는
“나 지금 나를 못 믿겠어”가 숨어 있다.
화는 감정이 길을 잃었을 때
제일 먼저 도착하는 비명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를 이해하기로 했다
화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다만 번역이 되지 않으면 폭력이 되고,
이해받지 못하면 외로움이 된다.
운전대 위에서든,
삶의 한복판에서든,
우리는 누구나 부딪히고 멈추고, 때로는 욕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내가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다.
화는 감정이 보내는 긴급 메시지다.
그 메시지를 감정의 언어로 통역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늘 당신이 낸 화는
정말 그 사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늘의 당신 때문이었을까?
분노는 마음의 번역 오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다.
-정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