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담훈
關心種子 (관심종자)
“관심종자”는 인터넷과 일상 대화에서 주로 쓰이는 속어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과도하게 끌고 싶어 하는 사람을 비하하거나 비꼬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관심”: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
“종자”: 특정 성향이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
“관심종자”라는 말은, 사람을 비웃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사실은 그 말을 듣고 뜨끔한 사람일수록,
가장 간절하게 연결을 원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관종’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누구를 떠올리며 비웃기도 했고,
스스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자신은 ‘관종’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좋아요 개수부터 확인하는 사람.
댓글이 없으면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사람.
하루 중 가장 뿌듯한 순간이
“오, 이 글 반응 좋네”인 사람.
그 사람,
혹시 당신은 아닌가?
관심받고 싶다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일 텐데.
다만 요즘은 그 관심이
존재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반응이 없으면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보이는 나’를 만들어낸다.
“잘 살고 있다”는 척.
“감성적인 하루였다”는 척.
“나는 괜찮다”는 척.
모두가 연기하는 세상.
연기가 진짜 감정을 덮고,
포장이 내면을 대체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관심받을 수 있는 자아’를 소비하며 산다.
그들은 무대가 꼭 SNS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보면
결혼식장에도 관종은 존재한다.
하객으로 참석했음에도 신부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축사는 없지만 마이크가 있었다면 분명 들고 나섰을 사람.
카메라를 보면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오늘 결혼하는 사람 누구더라?”
관심종자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순간에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 장소가 강의실이든, 장례식장이든, 결혼식장이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세상은 늘 무대, 나는 주연, 당신은 관객이다.
관종은 누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시대의 자화상이다.
관심 없이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시대.
무대는 늘 켜져 있고,
관객의 박수는 끊임없이 필요하다.
관종이라는 단어에는
비웃음과 동시에,
도움 요청이 섞여 있다.
“나 좀 봐줘요.”
“제발, 나를 잊지 말아 줘요.”
“나는 여기 있어요.”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그런 거 관심 없어.”
하지만 그 말조차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내뱉는 건 아닐까?
관심을 부정할수록,
사실은 더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종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는
그 단어 안에 나의 일부가 들어 있어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강하게 부정한다.
어쩌면, 거울 속 자신일지도 모른다.
사실 ‘관심종자’는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 없이는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외부 지향적 자아’에 해당하며,
자기 가치 기준이 내부가 아닌 타인의 눈과 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관심 갈망의 뿌리는
대개 자기애 결핍 또는 애착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크게 세상에 “나 좀 봐줘”라고 외친다.
철학자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삶을 견디지 못한다.”
존재는 누군가의 인정 안에서 더욱 명확해지며,
그 인정에 중독되면 스스로를 소비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덧붙인다.
“타인의 시선은 곧 지옥이다.”
관종은 결국 타인의 눈에 갇힌 자아이며,
그 시선 안에서 진짜 ‘나’는 점점 흐려진다.
관종이라는 말이
비난이 아닌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렇게 관심을 갈망하는가?”
“나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
질문은 때때로
가장 강력한 자각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은
관종을 비웃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건네기 위한 글이다.
“괜찮아요. 누구나 관종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관심이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게 하세요.”
관심은 살아가는 연료가 될 수 있지만,
존재의 정의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관심을 추구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관심종자는, 기준을 넘었기 때문에 관심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은 때와 장소,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표현’은 타인과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고
‘자기 과시’는 타인을 지워버릴 때 불편해진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러운 관심’이 아닌
불편한 과잉 존재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관심은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관심종자야…”
✨ 관심은 누구나 원한다. 하지만 그 관심이 빛이 되려면, 기준을 알고, 상황을 읽을 줄 아는 세련됨이 필요하다.
좋아요가 없어도,
댓글이 없어도,
누구의 반응이 없어도,
내면의 작은 떨림 하나로
오늘을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기를.
무대 조명이 꺼진 뒤,
박수도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온기로 길을 밝혀 나올 수 있기를.
침묵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끌어안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때야말로
‘관종’이라는 말에도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존재가 완성될 것이다.
✒️ 정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