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천천히 삶아낸 고기다

by 정담훈

《삼격살》 4화. 자존감은 천천히 삶아낸 고기다

✒️ Written by 정담훈
오늘 구워볼 부위: 앞다리살

자존감 [自尊感 / self-esteem]
“자존감은 기름에 튀겨지지 않는다.
시간에 천천히 삶아지며,
조용히 본래의 결을 드러내는 고기처럼 완성된다.”


앞다리살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기름이 적고 결이 굵어, 요령 없이 굽다간

질기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기름이 흐르고 부드러운 고기를 찾는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바로 반응이 오는,

쉽게 즐길 수 있는 고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앞다리살은 다르다.

시간이 걸리고, 손이 가고,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맛이 드러난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고,

억지로 자신을 어필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삶아지며,

자기 안에 있던 풍미를 서서히 꺼내 보여줄 뿐이다.

자존감이 꼭 그렇다.


누구나 자존감이 흔들리는 순간을 지나간다.

남들은 앞서 가는 것 같고,

내 자리만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시간.

직장에서는 남들이 성과를 인정받고,

친구들은 SNS에서 환호를 받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선 것 같은 밤.

그럴수록 자존감은 쉽게 무너진다.

마치 불 앞에서 질겨지는 고기처럼,

내 본래의 결이 드러나기도 전에

스스로를 초라하게 단정 지어버린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히 마음이 무겁던 밤.

습관처럼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써두었던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짧고 서툰 글이었지만

그 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간절했던 내가 있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무도 나를 칭찬해 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상은 몰라줘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버텨왔는지,

어디까지 혼자 걸어왔는지,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이 나를 다시 붙들었다.


앞다리살이 수육으로 삶아질 때

끓는 동안 불필요한 기름이 걷어지고

본래의 결만 남듯,

우리의 자존감도 그렇게 다듬어진다.

자존감은 남의 박수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켜낸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앞다리살은 쉽게 씹히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맛본 사람은 오래 기억한다.

질긴 결 속에 단단한 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도 그렇다.

크게 외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


한 번은 지하철에서

낡은 참고서를 붙잡고 문제를 푸는 학생을 본 적이 있다.

지우개 가루가 바지 위에 흩날렸지만

그 눈빛은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 집중과 땀방울에서 묵직한 힘이 전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존감은 누가 쳐다봐줄 때 생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는 순간에 쌓이는 것임을.

기름기 없는 날들이

무미했던 것은 아니다.

질기고 뻣뻣했던 내 날들 속에도

풍미는 있었다.

내가 나를 지켜낸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맛을 품고 있었다.


자존감은 결국 삶아낸 시간의 향이다.

누구보다 오래 씹어본 사람만이

그 깊이를 안다.

앞다리살이 오래 삶아내야 깊은 맛을 내듯,

자존감도 천천히 걸어온 날들 위에서만

진짜 향을 낸다.

그리고 그 향은,

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