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으로 피었다

by 정담훈

〈무명으로 피었다〉

정담훈


너는

말보다 먼저 피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숨결로,


산의 어깨를 스친

첫 번째 어조

누구도 듣지 못한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며 솟았다


병아리만 한 몸

부리를 닮은 노란 꽃바침

이끼 젖은 바람을 껴안고

흙 위에 바늘처럼 박힌 채

소리 없이,

자기 존재를 피워냈다


닿지 않은 것은

기억도,

햇살도,

사람의 말도 아니었다


닿지 않은 것은

세상이 너에게

붙이려 했던

모든 정의였다


그래서 너는

구름처럼

무게를 버린 삶으로

산을 흘러내렸고


나는 오늘

그 사라짐을 마주한 자리에서

내 이름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꽃 설명 — 구름병아리난초

학명: Pseudodiphryllum albiflorum (비공식/미기재)


자생지: 한라산, 백두산 고지대 일부, 습윤한 암석지대


특징:

구름처럼 희미하고 병아리처럼 노란, 아주 작은 난초류의 야생화.

실제로는 개체 수가 매우 희귀하며,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음.

5월 말~6월 초 사이 짧게 피고, 바람에 쓰러질 정도로 여린 줄기를 가짐.

꽃말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가볍고 조용한 존재감”으로 불릴 만하다.

학자들 사이에선 이 꽃을 ‘침묵의 꽃’이라 부르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