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격살》8화. 신뢰는 말보다 깊게 스며드는 것이다.
✒️ 글: 정담훈
오늘 구워볼 부위: 족발
신뢰 (信賴 / Trust)
"신뢰는 말보다 깊게 스며드는 것이다.
크게 튀지 않지만 조용히 중심을 지키는 감정,
족발처럼, 천천히 익어갈수록 깊어지는 무게다."
족발은 요란하지 않다.
불판 위에서 치익~ 소리를 내지도 않고,
눈길을 확 잡아끄는 기름빛도 없다.
입에 넣었을 때도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밋밋하다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찾게 된다.
젓가락이 습관처럼 족발로 향한다.
자극은 없지만, 실망도 없다.
그건 입이 아니라 기억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족발은 천천히 삶아지는 고기다.
불을 직접 만나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속까지 익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 동안 자기 맛을 흘리지 않는다.
묵묵히 제 결을 간직한 채
한 점 한 점이 무너지지 않도록 익어간다.
신뢰라는 감정도 그렇다.
한순간에 터지지 않는다.
천천히 스며든다.
확신 대신 여백으로,
다짐 대신 반복으로,
말없이 곁에 있는 시간 속에서
언제부턴가 안심하게 되는 사람.
그게 신뢰의 시작이고,
족발의 맛이다.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다.
술자리를 주도한 사람도 아니고,
사진 속에서 가장 환하게 웃은 사람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빠진 날엔 공기가 달라진다.
불판이 괜히 더 빨리 타는 것 같고,
대화는 이어지지만 깊이가 없다.
존재감은 드러날 때보다, 사라졌을 때 더 선명해진다.
신뢰도 그렇다.
족발은 익는 속도가 더디다.
성급한 불에는 금세 질겨지고,
덜 삶아지면 쉽게 씹히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견디면,
그 어떤 감정보다 오래가는 맛이 배어 있다.
기름이 아니라 결로 기억되는 고기.
천천히 씹을수록
그 사람의 태도가 떠오른다.
항상 같은 말투, 같은 온도,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
거창한 위로는 못 했지만,
힘들 땐 조용히 소주잔을 채워주던 사람.
내가 무너질까 봐 조심스레 건넨 그 손끝.
그것만으로도 신뢰는 생겼고,
그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젓가락이 족발을 향할 때,
그건 큰 기대 때문이 아니다.
실망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신뢰란 그런 것이다.
확신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관성.
말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함으로 증명되는 감정.
족발은 익숙한 맛이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수많은 향신료와 뼈,
긴 시간의 불과 물이 함께 만든 맛.
겉은 반짝 윤기가 돌지만
그 속에는 오래 삶아낸 진득한 내공이 스며 있다.
말없이 천천히 삶아낸 고기.
기억보다 오래 남는 맛.
그런 사람이 있다.
익숙하다는 말이 곧 믿는다는 뜻이 되는 사람.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고,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아도
찾으면 언제든 그 맛을 내어주는 사람.
나는 안다.
신뢰란 거창한 약속에서 생기지 않는다.
늘 같은 온도로 곁에 머무는 시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낸 시간이
서서히 신뢰의 맛을 빚어낸다.
내가 오늘도 젓가락을
다시 그 쟁반 위로 가져가는 이유.
그 사람이,
익숙한 맛이 된 사람이다.
쉽게 질리지 않고,
언제 꺼내 먹어도 마음이 놓이는 맛.
신뢰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오래 삶아낸 국물 같은 것.
짭조름하고, 부드럽고,
무엇보다 든든하게 남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