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가 없을 때,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by 정담훈

✒️ 정담훈 (Jung Dam-Hoon)


5화. 휴지가 없을 때,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사람은 앉아야 생각한다.

그중 가장 인간적인 자세는 화장실 자세다.

무릎보다 엉덩이가 낮아질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해진다.


그곳은 유일하게 위아래가 없는 방이다.

사회적 위치와 계급 따윈 필요 없는 곳이다.

같은 자세로 앉는다.

바지를 내리는 순간

그 앞에선 누구도 폼 잡지 못한다.

모든 걸 비우고 나서

손을 뻗었는데

휴지가 없다...


그 순간, 인생은 정지한다.

공기까지 얼어붙는다.

무릎은 덜덜 떨리고,

심장은 사소한 리듬을 놓친다.

이건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존엄의 붕괴, 통제의 상실, 존재의 균열이다.


손은 다시 더듬는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혹시나 싶어 롤커버 안쪽까지 확인한다.

없다...

쓰다 남은 휴지가 있는지

휴지통도 쳐다본다.

없다...

진짜 없다...


자, 이때부터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 된다.

"지갑에 영수증 있었나?"

"아... 지폐를 구겨서 닦아볼까?"

"혹시 내가 입고 있는 이 팬티...?"

그리고 오늘 하루 노팬티로 살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존엄으로 살 것인가, 실용으로 버틸 것인가.


내가 나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이 한 칸짜리 화장실에서

모두 드러난다.

밖에선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린다.

슬리퍼 끄는 소리,

핸드폰 버튼음,

화장실 앞에서 친구끼리 나누는 수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저기요... 혹시... 휴지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한데... 저, 지금 약간 곤란한 상황인데요...”


정중하게, 인간적으로, 작게.

하지만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10분을 더 앉아 있는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세상이 다시 조용해질 때까지.

그리고 조심스레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닦지 못했고,

부탁하지 못했고,

그저

인생의 자존심 한 장 잃고 나왔다.


왜 그게 인생의 시작이냐고?


그건 우리가 평소에 ‘나’라고 믿어온 것들이

그 순간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말 잘하는 나,

자신감 있는 나,

체면 지키는 나,

인정받는 나.


그 모든 ‘나’들은

그 순간

아무 소용없었다.

그제야

진짜 내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누군가 문틈 아래로

말없이 휴지 한 장을 건넬 수도 있다.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라는 말 없는 연대였다.


그날 나는 알았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휴지가 되어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그 한 장 덕분에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을.

삶은 결국,

모든 게 준비된 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을 때, 누군가의 손길로 시작된다.



비어 있는 것.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필요한

가장 명백한 증거다.

그러니 말하자면,


그날 닦지 못하고 나온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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