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준가 Sep 09. 2021

어떤 폭탄




책을, 그것도 일상 에세이를 내고 나니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것이다.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글감을 찾나요?" 

작가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감정이 많은 것 같다. 그냥 감정이 아니라 강렬한 감정. 한두 시간, 하루 이틀이 지나도 쉬이 잊히지 않을 정도의 강렬함을 느끼고 나면 이 마음을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든다. 그럴 때 글을 쓰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우리 집이 올빼미 생활을 한다는 걸 아는 엄마는 가급적 오후에 연락을 하시는데 오늘은 조금 이른 낮 12시경에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엄마는, "나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라고 본론을 꺼냈다. 

내용인즉슨 어제 내가 엄마를 만나러 망원동 집에 갔을 때 했던 말이 엄마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신앙과 교회에 대한 대화였다. 


엄마의 말.

"너 매일 성경 말씀은 보니? 말씀은 꼭 매일 봐야 해."

"매일 아침 먹고 난 뒤에 김 서방이랑 같이 큐티를 해."

"너 옛날에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많이 했는데 그때 생각이 난다." 


나의 말. 

"아니 뭐 매일은 안 보지." 

"막상 그때는 내가 교회에서 뭘 하는지 별로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내 생활에 자꾸 이래라저래라 안 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미 마흔이 넘었고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어." 


엄마 말의 속뜻은 '너 옛날에는 교회 열심히 다니더니 왜 지금은 그렇게 안 하고 허술한 신앙인이 되었냐. 예전처럼 다시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잘해라.'이고, 내 말의 속뜻은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다니던 시절부터 냉담자가 된 지금까지 수많은 과정과 이유와 맥락이 있는데 그 구체적인 일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내 신앙생활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 달라.'였다. 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다. 그냥 평소처럼 네네,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대충 얼버무리며 넘겼어야 했다. 잠깐을 참지 못한 나의 말이 그만, 엄마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폭탄 중 하나를 건드렸다. 





엄마는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결혼하면서 서울로 왔고, 아빠는 전북 남원 출신으로 고등학교 때 상경하면서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는 시골 출신이 서울에 많을 때이지만 그래도 서울에 산다는 이유로 시동생(남 2, 여 2) 모두와 시어머니까지 모셔야 했던 엄마의 신혼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고달팠을 것이다. 시동생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도 남편, 언니와 나 두 딸, 시어머니와 살면서 여러 가게와 일터를 일구고 또 허물어가며 엄마는 애쓰고 또 애썼다. 하지만 먹고사는 게 늘 우선이다 보니 내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교회에서는 또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상황에 처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게 서운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 그랬으니까.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과 허물없이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친구들이 드물었다. 자녀가 자라도 편한 친구처럼 지내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요즘 부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양육 환경이었다. 


그랬는데 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와 엄마는 언니의 자녀인 손자 손녀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키웠던 그날들이 떠오르시나 보다. 그때는 엄두도 못 내던 좋은 장난감, 눈높이 교육, 풍부한 환경, 양육을 함께하는 다정한 아버지상 같은 것들 말이다. 손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지난 엄마의 날들이 가슴속에 자꾸 고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우리들에게 불쑥 미안하다고 말하는 요즘의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는 '관심도 없다가 왜 다 큰 이제 와서 그러냐'며 따지듯 말했으니 엎친 데 덮치고, 불난 데 부채질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속 응어리를 정확히 조준해 화살을 날린 셈이었다. 엄마는 그 말이 큰 상처가 되었다며 울었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이제 나를 안 만나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조금 답답해져서 

"엄마,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엄마는 '야, 우리 땐 다 그렇게 살았어.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 이상은 니가 알아서 커야지!'라고 응수해야지!" 

라고 말하니 엄마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니가 원하는 그런 스타일의 엄마가 아냐, 나는 상처 받아!" 

라고 말했다. 응 맞네, 우리 엄마는 상처 받는 사람이지. 엄마랑 친구였다면 아마 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썼을 텐데, 엄마가 엄마라서, 불끈 나도 모르게 말을 뱉어버린 거지.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다시 안 하면 뭐 해! 이미 네 맘 속에는 그 생각이 있는걸!" 

엄마는 여러 번 사과해도 나를 용서하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한 말은 그저 엄마의 잔소리를 그만 듣고 싶다는 신호였지만 엄마에게는 비수가 되어 버렸기에 엄마를 상처 입혔다는 그 자체로 나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소리를 꽥 지르고 끊어버린 엄마를 달래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엄마를 위로해 보았다. 어떻게든 조금은 풀린 상태로 전화를 끊고 났으나 이번엔 내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다. 


어제 한 말은 내가 엄마를 포함한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애교 수준이다. 나에게 엄마는 사랑해 마지 않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성장기 내내 언니와 나를 비교해 평생 갈 상처를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 상처가 더 큰가 대결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엄마의 반응에는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엄마는 53년생 뱀띠. 올해 67세다. 엄마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엄마 마음이 약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눈에는 한결같이 예쁘고 별로 할머니 같지도 않은 우리 엄마가 어느새 일흔을 앞두었다니, 시간이 이렇게 갔구나. 엄마는 얼마나 억울할까. 인생의 황금기를 살림하며 돈 벌며 사방 뛰어다니면서 정신없이 살았는데 다 큰 딸은 이제 와 그런 소리나 해대니 갑자기 울분이 터질 만도 하다. 


내가 자주 보는 유튜브 영상 중에 퀴어 무당 홍칼리 님의 채널이 있다. 한동안 주간 운세를 올리시다가 요즘엔 월간 운세를 올리는데, 내 나이에 해당하는 9월의 운세에 '갑자기 사람들이 나에게 불친절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칼리 님은 식당이나 가게에 갔을 때를 예로 들었는데 나에겐 그게 친정이고 엄마였나. 그럴 때의 대처법은 같이 싸우지 말고 아량을 넓혀서 상대방을 포용하라고 한다. 사실 나는 다시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가 한 말은 엄마가 나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칼리 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을 고쳐 먹게 됐다. 


엄마는 이제 나이 드셨어. 엄마는 몸이 약해진 만큼 마음도 약해진 거야.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잖아. 그만큼 삶에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야지. 이제 내가 엄마를 품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야 내가 어른이지. 엄마가 사춘기라고 생각하자. 따지고 싶어도 그냥 넘어가자. 앞으로 이런 일은 더 자주 일어날 수 있어. 그러니까 엄마 앞에서는 이제 말 한마디도 조심하자. 


곧 명절인데 이런 불편한 마음으로 어떻게 또 전화를 하고 만나고 할지 걱정이 되는데 사실 부부싸움뿐 아니라 모녀 싸움도 칼로 물 베기다. 우리는 곧 별거 아니라는 듯 안부를 묻고 웃고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하겠지. 눈물이 난 만큼, 상처가 생겼다 아문 만큼. 


근데 엄마, 진짜 그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서운해 마요. 엄마도 엄마가 한 노력을 당당하게 말하고 '뭐 어쩌라고!'의 자세로 사세요. 이제껏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그냥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뭐든 다 하고 사셨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게 진짜 내 마음이란 말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한 이야기로도 에세이집을 낼 수 있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