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자> 제작기2 - 조판, 판형, 제본, 인쇄, 판매
퍼블릭도메인을 이용한 물고기 시 그림집 <바다로 가자> 제작기를 이어서 씁니다.
1편 보실 분들은 아래 링크로.
https://brunch.co.kr/@junga-pic/70
3. 그림과 시의 배치
그렇게 해서 모은 물고기 그림들을 김영랑의 시 <바다로 가자>와 한 행에 한 그림씩 짝지었습니다. 그림을 수없이 고르고 살펴보며 시의 표현과 어울리는 점을 찾았습니다. 어떤 그림은 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어떤 그림은 시와 완전히 반대편으로 달려가버리기도 합니다. 시에 운율과 율동이 있듯, 책 전체가 어떤 곡선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짝을 다 지은 뒤에는 요소의 배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인 그림책처럼 그림을 놓고 빈 공간에 혹은 적절한 위치에 글을 한 줄씩 넣는 방법 또는 시와 그림을 완전히 떨어뜨려 각각 감상하게 하는 방법, 아니면 한 페이지에는 그림 한 페이지에는 시를 배치해 번갈아 감상하는 방법 등등 몇 가지를 고려하다가 글과 그림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책 전체를 생각했을 때 기능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 전문을 목차로 만들고, 쪽표제(하시라)로 넣었습니다. 실제 단행본 편집에서 쓰이듯이 그림이 가득 차는 면에는 쪽표제를 생략하였습니다. 글과 그림은 완전히 붙지도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채 일정 거리 안에서 그리고 한 권의 책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4. 제작 - 판형과 제본
기획을 마치고 원고가 준비되면 실제로 책을 제작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아래 한글이나 워드로도 책을 만들었고 매킨토시에서 쓰이는 편집 프로그램인 쿽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출판계에 발을 들인 시기부터 점점 인디자인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15년 전쯤입니다.) 지금은 인디자인 아닌 프로그램으로 책 만드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만큼, 인디자인은 대표적인 출판 편집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인디자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물어보시면 저는 "포토샵과 아래한글을 합쳐 놓은 것 같은 프로그랩입니다."라고 답하곤 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 두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쓰는 분이라면 인디자인도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예전에 쿽을 다루어 본 분들은 더 금방 배울 수 있고요. 인디자인이 쿽을 따라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단축키도 쿽 버전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디자인 처음 시작할 때 쿽 쓰던 분들께 배워서, 지금도 단축키는 쿽용으로 설정해 놓고 씁니다. 작게라도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인디자인 기능을 천천히 익혀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단순한 몇 가지 주요 기능만 익히더라도 책을 만들 수 있어요.
먼저 판형을 정하고, 인디자인에서 글과 그림을 기획에 따라 배치했습니다. 판형은 책의 크기를 말합니다. 저는 처음에 경제판형(인쇄 시 종이 버려지는 부분이 적은 판형을 이렇게 부릅니다) 중 가장 작은 판형인 문고판 사이즈를 생각했기 때문에 115mm*188mm로 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 결정을 잠시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건 좀 이따 나와요) 페이지는 40페이지입니다. 마침 컨텐츠의 분량이 잘 맞아 떨어졌고 (기획 단계부터 고려하면 좋습니다.) 1-2페이지 정도는 속표지, 판권, 목차 등 책의 여러 구성 요소를 넣거나 빼면서 조정할 수 있습니다. 40페이지로 맞춘 이유에는 제본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본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제본인 중철로 선택했습니다. 기획하면서 클립이나 고무줄, 실제본 등 몇 가지를 고려했습니다만, 클립이나 고무줄은 종이가 쉽게 상하고 페이지를 단단히 고정하지도 못해서 탈락했습니다. 실제본도 가장 간단한 방법(중철-실제본)을 시도해봤지만 손은 많이 가는데 별로 예쁘지 않아서 역시 탈락했습니다. 여튼 고려한 제본법들은 모두 시도해 봤으나 실패했습니다. 결국 스테이플러로 중간에 철을 박아 고정하고, 철이 보이는 게 싫어서 색실로 한번 감싸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5. 제작 - 리소 인쇄
책을 보셨거나 사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다로 가자>는 리소그래피(리소)라는 인쇄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리소라는 회사에서 만든 실크스크린 원리를 이용한 일종의 복사기가 있는데, 이 기계로 하는 인쇄를 리소그래피 혹은 리소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도 최근에 쓰이는 것이고 원래 리소그래피란 석판화를 의미합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리소 인쇄 기법이 최근에 각광을 받은 것은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 독특한 잉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소 회사에서 만드는 특유의 잉크 색감이 매우 다양하고 쨍해서 별색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심지어 금색, 은색, 형광색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소량 제작이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옵셋 인쇄기에서 별색을 쓰려면 잉크를 따로 조색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최소 수량도 많습니다. 리소는 단연 독립출판과 잘 어울리는 인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많이들 리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또 리소야?"라는 시각도 있다는 것을 되새겨봅니다. 인쇄 기술로 특이점을 얻는 것도 책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제 더 이상 리소는 특이하지 않아졌어요.
<바다로 가자>가 리소를 선택한 것은 앞서 말한 워크숍에서 자문을 해주신 이선경 디자이너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른 다양한 물고기 그림들은 모두 다른 작가, 다른 시대, 다른 기법의 그림들입니다. 책 한 권을 아우르는 통일성이 부족한 상태였지요. 이 지점을 극복하기 위해 리소 인쇄를 하면 일종의 필터를 씌우듯 한 겹의 특수한 효과를 내서 책 전체의 통일성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리소로 인쇄를 하면 일반적인 인쇄기에 비해 망점이 크고 거칠게 나옵니다. 마치 필름 사진의 노이즈 같지요. 또한 잉크를 한 가지 색만 지정해서 전체를 인쇄하면 별색 1도의 책이 됩니다. 또한 리소 1도로 인쇄를 하더라도 농담은 표현할 수 있습니다. 리소의 한계점을 이용해 제가 원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디지털 인쇄를 이용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제가 이미지를 아주 많이 가공해야 했을 겁니다. 포토샵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손이 엄청 빠르지도,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는 리소 인쇄가 아주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리소를 선택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재단과 제본입니다. 리소 인쇄는 대부분 '인쇄만' 제공하기 때문에 재단과 제본은 따로 외주를 맡겨야 합니다. 이때 제가 알아본 견적은 이렇습니다. 리소 인쇄 30부 = 12만 원, 재단 및 제본 10만 원 이상. 제본을 수작업으로 하거나 기계를 한 번 돌리는 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에 제작 수량이 적어도 가격이 높다고 합니다. 제작비가 높아지면 책 가격도 높아져야 하는데 40페이지 중철 작은 책을 비싸게 사고 싶은 사람은 없겠죠. 제작비를 그렇게 많이 들일 수가 없어서 자가 제본을 하기로 했습니다. 재단은 리소 인쇄하는 곳에 수동 재단기가 있어서 제가 가서 그것을 빌려 직접 해보기로 했고요.
판형 이야기를 잠깐 추가하자면, 앞서 말한 문고판 사이즈는 일반적인 인쇄에 쓰이는 전지를 기준으로 한 판형입니다. 그런데 리소 기계에는 전지가 아니라 A2 사이즈의 종이가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인쇄 가능 영역이 또한 다른 인쇄기랑 다르기 때문에 제가 생각한 경제판형은 무너졌습니다. 115mm*188mm로 제작하면 로스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차라리 판형이 조금 더 크거나 조금 더 작았다면 훨씬 경제적인 제작을 했을 것입니다. 인쇄까지 모든 기획을 한번에 마쳐 놓고 진행한다면 이런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리소 인쇄는 이 책에 딱 맞는 인쇄법이었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좀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면 왜 그때 판형을 수정하지 않았느냐? 시간이 없었고 저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제작해 제본까지 완료해야 했기 때문에 또 하루 이틀 파일을 수정하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았습니다.
리소 잉크를 선택할 때에도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었습니다. 명암 표현이 다른 잉크보다 좋고 글씨를 인쇄해도 가독성이 크게 나빠지지 않으며 물고기 시 그림집이라는 책의 기획과 어울리는 색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고른 색은 녹색과 청색의 중간쯤 되는 색인 '틸그린'입니다. 바다에도 이 색이 있고 어떤 물고기의 몸에도 이 색이 있지요. 하늘에도 있고 녹조에도 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사대강 사업으로 인해 낙동강이 녹조라떼가 된 시점이어서 녹색 강물 속의 물고기를 상징한다는 의미도 스스로 붙여 보았습니다. 30부 인쇄를 주문했는데 여분를 넉넉히 해주시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만든 수량은 40부가 되었습니다. 제본은 위에서도 설명했듯 집에서 하나하나 구멍을 뚫고 스테이플러심을 박은 뒤 색실로 둘러 마무리하였습니다. <바다로 가자>가 절판된 뒤 재판매를 요청하는 분들이 계셨지만 이거 만드는 데 손목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은 못 만든다고 해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맨날 아픈 손목이 더 아파진 날들이었습니다.
판매 금액은 제작비, 서점 수수료를 고려해 6,000원으로 정했습니다. 또한 판권면에 넘버링을 해서 40부 한정판이라는 표시를 남겼습니다. 한정판으로 제작되는 도서에는 한정판 표시를 하는 편이 독자들에게도 더욱 특별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사는 입장에서 일단 그렇게 느끼니까요. 그해 언리미티드에디션이 끝나고 유어마인드와 오프투얼론에 입고되어 전량이 판매되었습니다. 심지어 샘플까지 판매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유머마인드에서 샘플 사신 분께 드리라고 제가 노트를 맡겨 두었는데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바다로 가자>가 완성된 사양에는 다양한 한계점들이 작용하였습니다. 소규모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독립출판물들을 살펴보면 바로 그 한계점이 특이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독립출판의 매력이 생겨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판매되지 않는 책 <바다로 가자> 이 책을 사신 분들이 누구인지 저는 모르지만 구매에 감사드리고, 부디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소중해 대해 달라고 말씀드리는 건 좀 무리한 부탁이겠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잘 부탁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는 말랑북스의 스테디셀러인 <엄마가 알려준다> 제작기를 써보겠습니다.
뒤표지의 이 인면어 그림, 제가 참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