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는 아주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다이어트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미취학 아동 때에도 나는 옆에 앉은 서현이의 하얗고 마른 몸을 부러워했다. 내 다리도 서현이처럼 가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교실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조각내며 부러워하고, 혐오했다.
너는 왜 배에 살이 안 쪄? 나는 뱃살 진짜 많은데.
쟤는 다리가 엄청 길고 얇더라, 난 종아리가 너무 짧아.
나는 광대가 너무 튀어나왔어,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매일 숨 쉬듯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 신체에서 가장 못나고 비루한 조각 하나를 꺼내 이게 정말 싫다는 이야기로 주로 시작되었다. 그러면 너도 나도 그 조각들을 꺼내며 함께 싫어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던 내 신체조각들도 타인과 비교를 하다 보면 싫어지곤 했다. 서로의 몸들과 TV 속에서 나오는 마른 연예인들의 몸들을 비교하며 내 몸을 혐오로 가득 채웠다. 혐오의 모자이크는 함께할 때 더욱 거대해졌다.
'대학 가서 꼭 살을 뺄 거야. 성형수술할래'라는 말은 모두의 습관이 되었다. 혐오의 모자이크가 채워질수록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은 적당히 볼륨감 있어야 하며, 셀룰라이트와 힙딥 없이 가느다랗고 긴 다리와, 덜렁거리는 팔뚝살이 없는'. 닿을 수 없는 완벽한 몸에 대한 신기루적 갈망이 피어났다.
그에 비해 내 다리는 왜 굵고, 셀룰라이트는 많은지.
엉덩이는 빈약하면서 등빨은 또 왜 이리 좋은지.
종아리가 길어지는 스트레칭, 골반이 넓어지는 운동, 셀룰라이트를 빼는 마사지 등 온갖 블로그와 유튜브를 찾아보며 따라 했다. 캐시 안벅지 운동, 마일리사이러스 레그, 티파니 허리운동은 멘트까지 외울 지경에 달했다. 목적이 다분한지라 살이 조금 빠지면 운동을 관두었고, 살이 찐 것 같을 때 다시 운동을 반복했다.
'이것만 먹고 내일부터 다이어트해야지, 오늘은 많이 먹었으니까 꼭 운동하고 자야지'
소위 다이어터-유지어터-아가리어터 삶을 살아내기를 십수 년. 완벽한 몸을 손에 넣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졌다.
이젠 다리가 좀 깎여나가야 하지 않나?
이젠 팔뚝이 좀 줄어들어야 하지 않나?
이젠 엉덩이가 좀 올라가야 하지 않나?
다이어트 자극짤을 찾아 저장하다 보면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나는 대체 언제 완벽한 몸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살이 쪄있는 내 몸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치부되었다. 나는 살이 잘 빠져있을 때에만 내 몸이 자랑스러웠다. 홈트와 식이조절을 시작하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저 멀리에 있는 멋진 몸에 도달할 때까지만 참자.'와 '내가 연예인 할 것도 아닌데 주말에 좀 먹는 건 어때'의 굴레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면서 살을 쭉 빼고 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뿌듯했고,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살이 좀 찌는 시기에는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예민해졌다. 누군가 내 몸에 대한 칭찬을 하면 '엥? 아니 이 거기말고 여기, 이걸 봐. 진짜 뚱뚱하고 이상하잖아'라는 생각을 하며 깊게 새겨진 콤플렉스를 들이댔다. 칭찬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몸에 대한 혐오는 계속해서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