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제자같지 않고, 친구 같고, 또 동료 같아질 때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거다. 말이 통하는 건 마음이 닮아가는 과정인데 이별은 어김없이 이 타이밍.
고3 아이들과 이제 마지막이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글을 쓰고, 오디오북처럼 남겨보기로 했는데 D가
“무엇을 쓸까요?” 했다.
“무엇을 쓴다.”
참 좋은 질문.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고민이라 더욱 좋다. 그리고 시집을 열었다. 지금 펴는 곳이 글의 소재가 된다, 얍. 허수경 시인의 ‘가을 저녁과 밤 사이’.
사랑은 무어냐?
당신을 두고 가는 거라고 대답했을 때 아, 우리는 멍들었네 이런 간단한 답은 이 가을을 매장한 삽만이 알 수 있었네 시체를 부검하는 칼은 초승달처럼 섬뜩하게도 가늘었네
그래서 아이들에게 ‘초승달처럼 섬뜩한’ 글을 써 보자고 했다. 소설이든 시든, 사랑이든 분노든.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초승달이 떴다. 시퍼렇게도 섬뜩했다.
D의 글, 섬세한 표현이나 몽환적 전개가 더 읽고 싶어지는.
D는 소질이 있다. 글을 계속 써야 느는 것이 맞지만, 이렇게 휘갈겨 써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부류는 말릴 수가 없다. 마치 본 것처럼 썼지만, 전혀 꾸며쓰지 않았다.(살아있는 글이란…) 긴장감 속에 흐르는 글의 섬세함이 심연을 건드리고 만다.
글을 다 읽고, 캬아…. 너는 글을 써야 한다고, D에게 웹소설을 써 보라고 했다. 내가 읽었던 웹소설들은 스토리는 좋은데 문장력이 떨어지는 것들이 많아 읽을 맛이 나질 않았었다. 그런면에서 D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H 아버님께서 쓰신 시, 대리과제는 아닙니다만ㅎ
H는 그날 병원에 가느라 수업에 못 들어왔다. 카톡으로 첫 문장을 주고, 과제로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H 아버님과 이웃인데, 그날 ‘시’를 올리셨다. 이 시퍼렇고 섬뜩한 초승달로.
첫문장이 좋아 아버님도 시를 쓰고 싶으셨던 걸까? 하는 자만에 빠지면서 시를 읽었는데 오, 좋았다. 사라진 별과 꽃들의 세상이 먹먹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퍼런 달과 조우하고 있는 깊은 밤이 서늘했다.
H는 곧 과제를 내기로 했으니 기다려보겠다. 방학식은 금요일이니까.
내가 썼는데, 중2병같은...
나는 글 쓰는 것을 즐기지만, 창의적이진 않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정도라 늘 쓰고 나면 ‘아, 부족하다. 부족해’.’라는 좌절.
소설을 쓰려면 무조건 한가해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김영하 작가님이 방송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 2023년 내내 여유없이 살았다는 증거일까? 머릿속은 온통 일 걱정, 돈 걱정, 놀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들 뿐이었다. 나아지지도 않는 불안과 고민을 안고 근근히 살았다.
이번 한 해는 우릴 너무 소모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도 나도 ‘시간을 가지는 것’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다른 건 좀 미뤄두고, 충분히 읽고 나누고, 그것들을 고민하고 기록하기로 했다.
이게 우리가 바라는 세계에 가까워지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파괴되기 않기 위해선 멈춰야 한다는 직감. 그래야 당신이 보이고, 가리웠던 것들을 볼 수 있고, 그때가 후회없었다고 돌이킬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