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더 써봐."
선배 카피는 아이디어가 부족하면 더 쓰면 된다고 했다. 카피가 약하면 더 많이 만들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썼다. 메모장에 가득 썼다. 10개, 20개, 50개. 많이 쓸수록 좋은 카피가 나올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물론 생각을 많이 하고 깊게 하는 건 좋다. 하지만 25년이 지나고 나서 깨달은 건 반대였다. 좋은 카피는 많이 쓰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버리는 데서 나온다.
카피가 많아지면 생기는 일
카피를 많이 쓰면 선택이 어려워진다. 10개 중에 고르는 것과 50개 중에 고르는 건 다르다. 50개가 있으면 좋아 보이는 게 너무 많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다. 결국 가장 무난한 걸 고른다. 가장 무난한 카피는 가장 기억에 안 남는 카피다. 차별화가 안된다.
반대로 3개 중에 고르면 집중이 된다. 이 셋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니까 더 깊게 본다. 차이가 보인다. 판단이 생긴다. 카피가 많아지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한 카피는 기능을 말하고, 다른 카피는 감성을 말하고, 또 다른 카피는 가격을 말한다. 브랜드가 뭘 말해야 하는지가 흐릿해진다. 카피가 많을수록 브랜드 메시지는 약해진다.
버린다는 것의 의미
버린다는 건 포기가 아니다. 선택이다. 10개를 쓰고 9개를 버리는 것과 처음부터 1개를 쓰는 건 다르다. 10개를 쓰고 9개를 버리면 그 1개가 왜 남았는지 안다. 어떤 기준으로 버렸는지 안다. 그 기준이 브랜드의 판단이다.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다. 초고는 항상 형편없다. 좋은 글은 고치는 과정에서 나온다. 카피도 마찬가지다. 처음 쓴 카피가 가장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가끔 유레카처럼 한방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 처음 쓴 건 머릿속에 있던 것을 꺼낸 것이고, 버리는 과정이 진짜 카피를 찾는 과정이다.
나이키가 Just Do It에 도달한 과정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 중 하나인 Just Do It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1988년 광고대행사 와이든+케네디의 카피라이터 댄 와이든이 수십 개의 카피를 쓰고 버리는 과정 끝에 나온 문장이다. 단 세 단어. Just Do It. 나이키는 이 슬로건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방향을 버렸다. 더 긴 문장들, 더 많은 설명들, 더 구체적인 기능들을 전부 버렸다. 남은 건 세 단어였다.
짧을수록 오래 걸린다. Just Do It 세 단어를 쓰는 데 걸린 시간이 긴 카피 백 개를 쓰는 것보다 더 걸렸을 것이다. 짧은 카피는 버리는 양이 많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요즘 세대들에겐 낯선 SK텔레콤의 011 시절 캠페인과 삼성 애니콜의 "한국 지형에 강하다", 박카스의 수십 년을 이어온 캠페인들. 이 카피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설명이 없다. 수식어가 없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 단순함은 처음부터 단순하게 써서 나온 게 아니다. 복잡하게 쓰고 버리고 버린 끝에 남은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문장 안에 브랜드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담으려 한 카피들. 기능도 말하고, 감성도 말하고, 가격도 말하고, 타깃도 말하고. 읽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 담을수록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좋은 카피를 버리는 것이 더 어렵다
버리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이 있다. 좋은 카피를 버려야 할 때다. 혼자 보면 좋은데, 브랜드 방향이랑 안 맞는 카피. 임팩트는 있는데 타깃이 다른 카피. 재밌는데 제품과 연결이 안 되는 카피.
이런 카피를 버리는 게 진짜 판단이다. 카피 자체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이 브랜드에 맞는지 안 맞는지가 기준이다. 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카피여야 한다. 브랜드 기준이 없으면 좋아 보이는 카피를 전부 살리게 된다. 그러면 브랜드가 흔들린다. 좋은 카피를 버릴 수 있는 능력. 그게 카피라이터의 실력이고 브랜드 담당자의 판단이다.
키카피를 찾는 방법
작년 고주파 의료기기 프로젝트로 고민하던 중 문득 발견한 카피는 바로 "피부에 와닿게"였다. 집중적으로 생각하며 동네 산책하다가 떠오른 워딩이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것. 이게 전부다. 단계가 있다. 먼저 제한 없이 생각한다. 생각 속에서 날카롭게 떠오르는 걸 꺼내서 쓴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고 생각나는 것을 전부 꺼낸다. 그다음 브랜드 기준으로 자른다. 이 브랜드가 말해야 하는 것과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카피를 전부 버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 중에 가장 짧고 가장 강한 걸 고른다.
이 과정의 핵심은 두 번째 단계다. 브랜드 기준이 명확할수록 버리는 게 빠르다. 기준이 없으면 버리지 못한다. 다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키카피를 못 찾는 브랜드의 대부분은 카피가 부족한 게 아니다. 기준이 없는 것이다. 키카피는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다. 찾는다는 건 버린다는 뜻이다.
판단이 먼저다. 제작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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