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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Aug 27. 2024

1박 2일 뉴욕 특급 작전

 Chapter 2. The Ambitious Boy #8

팀장으로부터 일방적 평가를 받았던 나는 이곳에서는 자율적인 성취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살면서 받아본 최악의 인사평가편). 


그럴수록 정말 본능적으로 내 살 길을 찾으려고 했고 더욱더 해외 쪽 업무에 집착하게 됐다. 목표를 아시아 헤드쿼터인 홍콩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하고 컨퍼런스콜에서나 해외 인력이 방문했을 때나 나의 존재를 느끼게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 성과가 좋지 않았던 본부장이 나 대신 홍콩으로 발령이 난다. 그는 영업직도 아니었고 성과도 좋지 않았지만 아시아 지역 보스랑 친분이 있었고 내부에 인맥이 좋았다. 일보다 정치에 능해야 성공하는 건가 싶었다. 




나는 팀장님보다는 팀에 있던 다른 고참 이사님 하고는 죽이 잘 맞았는데 이 분도 해외 쪽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상품에 대한 이해와 영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고 이 분은 국내 영업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합이 좋았다. 그러다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온다. 


미국의 자산운용사 중에 700조 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는 Alliance Bernstein(이하 AB)이라는 유명한 회사가 있었다. 계열사로 증권사를 두고 있는데 이곳의 글로벌 영업 본부장(이하 Robert)은 한국의 국민연금과 같은 큰 고객들과 거래를 하고 싶어 했다. 국민연금은 운용자산 1천조가 넘는 세계 3대 연기금이기 때문에 거래량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글로벌 증권사가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회사는 한국에 네트워크도 지사도 없었던 터라 영업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때 국민연금을 아주 편안하게 드나들던 우리 고참과 연이 닿았다. Robert 눈에는 국민연금의 높으신 분들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동양인 아저씨가 신비로운 영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평소에 국내엔 답이 없다는 생각이 일치했던 우리는 Robert에게 AB의 한국 지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마음속으로 고참이 대표를 맡고 난 넘버 2를 한다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고 그렇게 논의는 급물살을 탔고 AB의 CEO와 뉴욕에서 미팅이 잡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CEO와 미팅이라니, 성사된다면 정말로 목표했던 일을 하게 되는 패스트트랙이었다! 고참과 나는 미팅 일정에 맞춰 극비리에 휴가 계획을 세운다. 5명이 있는 부서에서 2명이나 휴가를 내다보니 아무리 뉴욕이라도 휴가를 길게 내는 건 무리였다. 


간신히 쥐어짜 냈던 건 단 이틀의 휴가. 그래서 어쩌다보니 뉴욕 일정이 1박 2일이 됐다. 




제주도도 이틀 일정으로 가진 않는데 다른 대륙을 가면서 1박 2일의 여정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뉴욕을 1박 2일로 다녀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정말로 주어진 시간은 딱 이틀이었고 그 안에 모든 걸 클리어해야 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대한항공 직항으로 JKF 공항에 같은 날 1시간 후에 도착한다. 시차 때문에 마치 같은 날 1시간 만에 이동한 것 같은 효과다. 이 시차가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정. 지구의 자전마저 나를 돕고 있는 느낌이었다. 



큰 목표가 있었던 출장이라 급하게 잡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남기고자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저녁으로 가장 미국 스러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메리칸드림이라도 이루기를 기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미팅이 있었지만 당연히 긴장감에 잠은 이룰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우리는 영화에서나 보던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관광으로 뉴욕에 왔을 때도 월스트리트를 구경했었지만 그때는 황소동상에서 관광객들을 피해 사진을 찍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화 'The Wolf of Wall Street'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AB 본사 사무실을 당당히 올라간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글로벌 금융회사의 뉴욕 오피스는 참 멋있었다. 사무실 안에 직원 전용 스타벅스도 있고 스시바도 있었다. 다들 전문가 같아 보였고 우리의 Robert는 쿨하게 셔츠 단추를 3개나 풀어헤치며 젖은 머리로 나타났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고 온 모양이다. 그런 모든 모습들이 나에게 준비된 미래인양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내가 꿈꿔왔던 글로벌 금융맨의 모습! 




AB의 CEO, 글로벌영업본부장 Robert, 한국에서 온 고참과 나, 통역사 이렇게 다섯 명이 CEO 미팅룸에 자리했다. 한 단어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였기에 사비를 털어 전문 통역사까지 대동했다. 그리고 약 1시간 30분 동안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집중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시각, 청각, 촉각이 예민하게 움직였다. CEO가 노트하는 펜소리마저 귀에 생생하다. 통역사의 통역이 너무 사전적이면 내가 개입해서 금융용어로 다시 방향을 수정하며 미팅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초긴장 상태여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지만 미팅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신뢰해 줬던 Robert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It seems to have a high potential for success. We will positively consider establishing an office in Korea(성공 가능성이 아주 커 보이는군요. 한국에 오피스를 설립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아. CEO의 이 마지막 말로 우리는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이건 그냥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헤어지는 인사를 하며 나눈 Robert의 웃음과 악수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있었다. 


미팅이 끝난 월스트리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다시 점심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1박 2일이라는 미친 여정이었지만 마음속 깊이 벅차오르는 성취감에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택시에 앉아 창밖으로 비 내리는 월스트리트를 바라보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건 이런 건가' 생각하며 김칫국도 미리 마셨다.  



1박 2일 뉴욕 007 특급작전은 그렇게 끝났다. 비 내리던 하늘과 달리 우리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곧 우리의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과연 우리는 한국 오피스를 세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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