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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24. 2021

사랑은 결혼으로 끝난다 1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나이의 친구들은 종종 내게 결혼을 추천하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땐 씩 웃으며 주호민의 "비혼주의의 완성은 결혼이다"를 인용하며 답을 대신하곤 한다. 하지만 그에 꼭 덧붙이는 말은 "상대방과 매일 밤 헤어지는 게 죽도록 싫다면 결혼은 할 만하다"이다. 아! 이 두문장을 온몸으로 이해하기까지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보내었던가. 때론 기쁨으로 때론 슬픔으로. 때론 행복으로 때론 고통으로, 그렇게 아득한 12년의 시간이었다. 연애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지난한 과정, 그리고 그와 동반하는 호감, 사랑, 미움, 분노 등 온갖 감정과 씨름하고 나서야 결혼을 추천하겠냐는 질문에 이젠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상대방과 매일 밤 헤어지는 게 죽도록 싫다면 결혼해. 하지만 그 후에도 사랑과 행복이 영원할 거란 희망은 품지 마."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 그리고 결혼은 그 시간을 앞당긴다. 이것은 과도하게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일까? 내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사랑과 결혼 모두 그 한계까지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비관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나만의 정직한 경험이 만인의 어설픈 관념보다 유익하기 때문이고, 사랑 그리고 결혼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건 보기와 달리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는 말은 아프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오래 사귀었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는 이유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그 반대 지점을 가리키는 근거가 태반이다. 오래 사귀었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왜 결혼을 미루는가? 결혼했지만 TV 드라마의 사랑이야기는 왜 그렇게 달콤해 보이는가?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고 자부하지만 매일 밤 포르노는 왜 보고 있는 건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배우자의 야근과 주말출근을 뜯어말리지 않는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자식을 밤마다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받아온 시험 성적에 불같이 화내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그 시간의 축적만으로, 결혼의 여부, 부부나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만으로, 그 밀도를 재단할 수 없으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밀도 자체가 사랑의 끝을 비켜나가게 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한때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자 종착지라 믿었다. 결혼만 하면 내 사랑은 더 크게, 더 강하게 자라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내 배우자는 내가 한때 온몸 받쳐 사랑했던, 온 세상이 무대이고 시간은 멈춰버린 멜로드라마의 아름다운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매일 밤 막차를 태워 보내는 게, 매일 밤 헤어지는 게 죽을 만큼 싫던 때도 있었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물론 이제와 보니 그런 로맨틱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하나보다 둘이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안정적이었고 그녀의 배경은 경제적 보험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관념에는 정서적 안정감, 경제적 안정감이 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와 결혼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순대와 떡볶이에 오뎅 국물 호호 불어가며 먹어도 행복했던 우리 사이에 '경제'라는 관념이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 추운 겨울날 몇 시간을 걸어도 행복했던 우리 사이에 '경제적 득실'이라는 관념이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 우린 점점 결혼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경제적 이득'이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 남녀는 '연인'에서 '경제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것도 분명 행복한 일이었다. 서로가 월급을 쪼개어 일정 정도의 돈을 함께 만들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하며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돈이 불어나는 걸 지켜보는 것, 언젠가 부자가 될 것만 같은 유쾌한 상상을 하다가 때론 멀리 여행도 가고 맛있는 걸 함께 먹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동생활에, 예산 계획에, 돈을 아껴 쓰고, 더 벌고, 그래서 미래를 계획하니 어쩌니라는 건 연인의 사랑보단 경제공동체의 과업에 가깝지 않은가? 마치 회사에서 매분기마다 예산을 어디에 얼마나 집행하고 그러기 위해 달성해야 할 목표의 우선순위를 따지고, 그럼 어떻게 매출을 늘리고 원가는 줄일까와 같은 그 잡다한 "계획"을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가족과 회사 모두 경제공동체의 속성을 띈다면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족과 회사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가족은 혈연관계이고 회사는 이해관계로서 경제공동체의 목적을 은폐하지 않은 채 그 경제성을 극대화한다는 것 말곤 없지 않은가. 지금에야 덜하지만 우리 부모 세대에는 공부 대신 돈 벌어오라고 자식들을 학교 대신 공장 보내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내 부모와 장인 장모는 내가 더 많은 돈을 벌기를 매일같이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가로 살 거라 하면 돈은 어쩔 거냐고 갈갈이 날뛸 것이고 회사 사장은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가로 살 거라 하면 연봉을 올려주겠다고 말릴 것이다. 무엇보다 내 부모와 장인 장모와 사장은 모두 내게 밖은 정글이라며 공포심을 조장할 것이다. 난 그들을 각기 부모로, 장인 장모로, 사장으로 부르지만 정작 그들 중 사장 아닌 자는 누구인가?


연인일 때는 사랑의 대상이었다가 배우자는 경제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조력자로 전락한다. 결혼정보회사나 소개팅 모두 경제력을 중요 지표로 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결혼은 그 시작부터 그 과정 모두 경제 논리와 함께 숨 쉰다. 가족은 사랑공동체보단 경제공동체이기 때문에, 결혼으로 사랑이 끝난다면 그건 결혼의 문제이기보다 가족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점만으로 가족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나날이 오르는 집값, 전셋값, 교육비에 조금이나마 보태려고 등골이 휘어질 판국에 무슨 얼어 죽을 사랑놀음이겠는가? 매일이 죽을 맛인데 집에 돌아와 배우자를,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가족이 경제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건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라는 식의 구조주의 편에 서서 안일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부잣집이라면 어떤가? 부자 아빠를 둔 가족은 사랑의 온기가 가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잣집은 사랑공동체여야 맞지 않겠는가? 부잣집에서만큼은 사랑이 끝나지 않아야 맞지 않겠는가?


나는 부자 아빠를 두진 않았지만 부자 장인을 뒀다. 연애 6년, 결혼 6년, 도합 12년간 처가를 면밀히 관찰해본바, 부잣집은 회사 그 자체이다. 회사가 굴러가는 방식 그대로 집안이 돌아가고 집안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역시 회사와 동일하다. 자식에 대한 애정은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나 자식은 장인 장모의 욕망 대리인에 불과하며 장모는 장인의 조력자로서 자식이 더 큰 자본주의적 성취를 달성하게끔, 때론 채찍을 때론 사탕을 흔드는 임원의 역할에 충실하다.


이것이 비단 부잣집의 작동 원리이기만 하겠는가? 평범한 우리 부모 역시 내가 출세하고 성공하길 매일 밤낮을 지극정성으로 기도한다.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내가 자본주의적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안도하고 그에 멀어질수록 공포에 질린다. 장모님 생신과 엄마 생신 때 똑같이 백만 원을 현찰로 선물했을 때, 그들 모두 두둑한 돈봉투를 쥐며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면, 그렇게라도 두 분이 웃었으니 내겐 작은 기쁨이지만 앞으로 두둑한 용돈을 못 드리는 날이 오게 될까 공포스럽다.


자본주의적 성공이라는 단일한 욕망 공동체. 그것이 가족의 민낯이다. 결혼 역시 통상적인 기준에서 가족의 시작과 존속의 기준이기에 이에 자유롭지 않다. 자본주의에 사랑이 있을 수 없다면,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본 단위로써의 가족에도 역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그 사이 미세한 틈을 뚫고 사랑이 지속되거나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그건 가족주의에, 자본주의에, 그리고 그것들을 음흉하게 욕망하는 나 자신에 저항하는 방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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