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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18. 2021

나를 위한 사랑, 너를 위한 사랑, 사랑을 위한 사랑

그날도 분명 난 들떠있었다. 괜찮은 저녁을 먹고 언제나처럼 모텔로 향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여자 친구는 저녁을 먹다가 대뜸 내게 말했다. 어제 생리를 시작했다고. 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말에 내 기대는 무너졌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산책이나 조금 하고 헤어졌다. 그 뒤로 난 여자 친구의 생리 주기를 대략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머릿속 달력에 4주마다 한 번씩, 5일 동안 X자를 그었다. 대략 28일 후 다음 주기가 시작될 때마다, 여자 친구는 배가 살짝 아파오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면 난 생각했다. 앞으로 5일간 널 보지 않겠다고.


그다음 여자 친구도, 그다음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그런 의문도 들었다. 섹스를 안 하면 너랑 뭘 해야 하나. 다시 산책이나 해야 하나. 배 아프다는 너랑 무슨 산책인가. 그럼 너는 나한테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너한테 어떤 사람인가. 같은 자리에 매번 사람은 바뀌었지만 의문은 늘 같은 자리였다.


그러다가 그녀를 만났다. 일주일에 7일을 만났던 그 시기에는 정말이지 불같은 섹스를 했다. 하루에 두 번도 세 번도 했다. 그러다가 생리를 시작하면 아쉽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생리통이 심한 그녀는 생리 2일 차에 퇴근 후 저녁 내내 집에서 누워 쉴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평소보다 더 긴 전화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어색함을 뚫고 생리대를 사는 새로운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젖은 수건을 전자레인지에 4분간 돌려서 뜨겁게 만들어서 그녀의 아랫배를 감쌀 때, 따뜻하다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생리가 지속되는 5일 동안, 그다음 섹스를 상상하며 기다림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사랑의 온기 속에 있었다.


늘 그때 같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 달력에는 다시 다섯 개의 X자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한 개의 X, 두 개의 X를 지나 다시 O가 오면 기뻤다. 그래도 이전과 달랐던 건, 나는 다시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고, 다시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사고, 또다시 따뜻한 수건을 배에 감쌌다. 이전과 같은 기쁜 마음이었지만 그 형식은 루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섹스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줄어갔다. 섹스마저 루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너 자체가 내 루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턴가, '너를 위한 사랑'이 '사랑을 위한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분명 그 시작은 '너를 위한 사랑'이었다. 너만 있으면 다른 모든 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너 말고 딱 하나만 더 필요했다. 너를 볼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그거 하나면 됐다. 나머지는 부차적이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함께라면 그곳이 우리의 무대였다. 함께 있지 않은 그 시공간 속에도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널 위해 더 해줄 것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너를 더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즐거웠으니까.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 너를 위해 나를 맞췄다. 그리고 그게 내 행복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 그것이 조금 벅찰 때가 되면, 아니 조금은 억울할 때가 되면, '너를 위한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 되기도 했다. 나를 위해 네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좋았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순전히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그것이 내 기쁨이라는 이유로 해주는 것이 좋았다. 몇 시간이고 네 품에 안겨서 진한 젖내를 맡는 것이 좋았다. 너를 위한 섹스가 아닌, 나를 위한 섹스도 좋았다. 네 삶의 주인공이 너 자신이 아닌 내가 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역시 황홀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내 부모 말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너를 위한 내 사랑 역시 오래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는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위한 사랑이라. 그게 무슨 말일까. 나를 위한 사랑도 아니고, 너를 위한 사랑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관념,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라는 관념, 나를 사랑하고 있는 너라는 관념이 한데 섞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네 몸도 없고, 내 몸도 없고, 감각도 사랑도 없는, 그저 관념뿐인 사랑이다. 관념이기에 사랑이 아니다. 관념일 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허울이고, 관념이고, 망상일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아니 사랑하는 것 같은 내 모습을 사랑하는 끔찍한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사랑은 관념 일리 없다. 나를 위한 사랑,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 일리 없다. 사랑에 네가 없다면 사랑은 그저 껍데기인 것이다. 사랑은 다 그런 게 아니냐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버린 사람 역시 껍데기뿐인 사랑,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해서 그런 것이다. 사랑을 위한 사랑을 너를 위한 사랑이라 오랫동안 믿어왔던 나의 허접함을, 내 어리석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리고 반성한다.


아마도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때론 너이기도, 때론 너 아닌 누군가이기도 할 것이다. 너와 너 아닌 누군가를 동시에 사랑하기도 할 것이다. 내가 너 아닌 누군가를 위한 사랑을 할 때, 너는 나를 위한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 아닌 누군가가 나를 위한 사랑을 할 때, 나는 너를 위한 사랑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괜찮다. 나는 이제 사랑을 위한 사랑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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