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치원생이었던 1991년 또는 1992년경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월급을 살뜰히 모아 인생 첫차를 샀다. 현대 스텔라였다. 가족의 첫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두들 신이 났다. 몇 주 지났을까? 밤사이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뒀던 스텔라가 사라졌다. 아빠 말로는 도둑맞았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다신 스텔라를 볼 수 없었다. 스텔라를 더 이상 탈 수 없다는 생각에 난 며칠간 서럽게 울었다.
어렸을 적 난 지나가는 차와 열차를 보는데 곧잘 정신이 팔리는 아이였다. 지나가는 차 이름을 모두 알아맞혀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루는 안양역에서 엄마와 같이 있던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한참을 찾았더니 안양역 안쪽 국철 플랫폼에서 혼자 기차 구경을 하고 있더랬다. 지금도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린 일로 기억하고, 난 황홀감에 넋 놓고 바라보다 난데없이 등짝 스매싱을 맞은 일로 기억한다. 그만큼 난 바퀴로 굴러가는 육중한 철 덩어리가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어쨌거나 스텔라는 아빠의 첫 차였지만 내 첫 차이기도 했다. 스텔라는 분명 아빠의 소유물이었지만, 내가 좋다는 감정을 실었던 대상인만큼 정서적으론 내 소유물과 같이 여겼다. 스텔라가 사라졌을 때 마치 난 내 일부가 없어진 것처럼 느꼈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슬펐던 걸까?
초등학교 5학년 때도 기억난다. 엄마에게 새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고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미 자전거가 있는데 왜 새 자전거가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낡은 자전거는 싫다고, 새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방에 엎드려 엄마가 들으라고 시위라도 하듯 꺼이꺼이 울었다.
비슷한 기억들을 모두 나열해 분석해보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이 좋다'는 감정이, '이것을 가지면 미래에 행복하겠다'는 기대로, 이런 기대가 다시, '이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동한다. 그와 동시에 갖고 싶다는 욕망은 갖지 못한 현재, 갖지 못해 불행한 것 같은 현재에, 즉 현재 갖지 못한 불행감과 미래에 가진 행복감 차이만큼의 결핍감을 만든다. 이에 결핍감은 소유욕을 정당화하고 소유가 행복이라는 믿음, 상실은 불행이라는 믿음은 강화된다. 현재는 결핍되었고 무언가를 소유하면 또는 무언가를 매개로 미래에는 결핍이 채워지리라는 믿음, 결핍이 채워진 만큼 행복이라는 믿음 말이다.
이것은 완전한 허구다.
현재의 결핍을 보는 자가 미래에는 충만을 보겠는가? 현재의 행복을 모르는 자가 미래에는 행복을 알겠는가? 결핍을 불행으로 인식하고 결핍의 채움, 결핍의 완전한 해소를 행복으로 인식하는 자에게 결핍이 사라질 수 있는가? 그러니까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핍을 계속 인식해야만 하고, 결핍을 인식하는 만큼 그는 불행하며 불행을 떨치고 행복하기 위해서 소유를 통해 결핍을 제거해야만 하는 조건 속으로 그를 밀어 넣는 게 아닌가? 결핍이 불행이고 결핍의 제거가 행복인 그의 삶은 역설적으로 결핍에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결핍이라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며 주관적인 조건의 해석은 '삶 안에 조건'이 아닌 '조건적인 삶'으로 삶 자체를 격하시키는 게 아닌가?
소유욕은 현재를 결핍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과 연애 그리고 결혼이다. 지난 내 삶이 이 주장의 근거다. 소유욕이 돈, 연애, 결혼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는 위에서 언급한 스텔라와 자전거의 예와 다르지 않다. 먼저 돈부터 살펴보자.
많은 이들이 많은 돈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기대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한다. 어렸을 적 돈이 없어 상처받았던 경험이 피해 의식이 되거나, 또는 어렸을 적 돈 많은 사람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걸 목격했던 경험이 돈 없는 것은 불행이고 돈 많은 것은 행복이라는 그만의 행복 방정식을 공고히 다진다. 그렇게 그는 돈을 소유하려 한다.
돈이 없다가 생기면 많이 행복하고, 여기서 돈이 조금 더 생기면 행복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덜 행복하고, 여기서 돈이 아주 많이 생기면 시큰둥하다. 돈과 행복의 관계는 로그함수 그래프와 같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돈을 더 많이 갖게 되는 만큼 행복도 그와 비례하게 커지지 않는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바로 이 순간을 바디우가 말한 "사건"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에 따르면 사건은 "비가시적이었던 것 또는 사유 불가능하기까지 했던 것의 가능성을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즉, 새로운 것의 도래 가능성, 창조와 생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하는 일생일대 기회의 창이다. 임계점 위에 멈춰 서서 의문을 품고 새로운 것을 탐색하며 그래프의 선에 점을 찍던가, 아니면 기존에 그려왔던 그래프의 선을 계속 이어나가던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목전에 둔다. 최소한 임계점을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물론 여기서 그는 헛헛한 마음, 즉 결핍을 느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돈을 다른 것을 소유하는데 소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많은 줄 알았던 돈은 점차 사라지고 그것을 '다시' 불행이라 여겨 '다시' 행복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 하며,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집에 탈진해서 돌아와 이것을 '다시' 불행이라 말한다. 이것이 지난 내 삶의 모습이다. 돈과 관련해서는 바타유의 가르침이 있으니 그것은 별도의 글로 이어가기로 한다.
연애는 어떤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롭다며 이것을 결핍으로 인식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기왕이면 연애(여기서 연애는 사랑과 다르다.)하길 욕망한다. 어떤 사람과 사귄다면 행복할 것이라 기대하고 사귀지 못하면 불행이라 한다. 어떤 사람을 사귀었더니 역시 이것이 행복이라고 좋아했다가 둘 사이가 삐걱대면 행복인지 불행인지 좋아하는 건지 안 좋아하는 건지 그 사이에서 혼란을 견디지 못해 쉽사리 결론 내려고 하며 그러다 헤어지면 불행하다 한다. 다시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 결핍을 느끼니,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되지만 지난 불행의 기억이 떠올라 하루 종일 주말 내내 같이 있으며 속박으로 소유하려 든다. 그렇게 숨통을 죄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인데, 아, 이건 정말이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쓰겠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움이고 결핍이며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움인가? 외로움이 곧 결핍인가? 외로움은 불행인가? 결핍이 정말 문제인가?
다시 돌아가 그는 이제 소유를 완성하려 하고 그것은 결혼이다. 연애와 결혼 각각에 결핍과 소유욕의 양상은 본질적으로 같으나 한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다면 결혼은 두 사람 관계를 소유로 감싸고 법이 이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즉, 결혼은 두 사람이 법의 테두리 안에 각자를 가두는 꼴이다. 민법 제826조 제1항을 보자.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동거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서로 인용하여야 한다."
아주 놀랍다. 법이 부부를 '동거'라는 형태로 규정하고, 각자 간에 '부양'과 '협조'라는 의무 조항을 명문화했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이것은 굉장히 폭력적인데, 법이 어떤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이것을 권하므로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반대로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위 항을 위반한다는 것은 이혼의 사유, 위자료와 같은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주장한 대로 법에 포획된 부부는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감옥에 가두고 법과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수순이다. 소름 끼치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위 항을 인용한 이혼 소송 판례는 수두룩한데 그중 하나는 부부를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결합된 공동체"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민법 제833조는 생활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하라는 것인데 이건 예전 글 <사랑은 결혼으로 끝난다 1>에서 말했듯, 가족의 민낯은 자본주의적 성공이라는 단일한 욕망 공동체라는 점과 연결된다.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족은 왜 법의 테두리 안에 포섭되어 있는가? 가족은 국가 체제의 기본 요소이자 복제품과 같기 때문에 국가는 법으로 가족의 존속을 보호해야 할 강한 동기가 있다. 국가와 가족 사이에는 필시 굵직한 무언가가 있다. 조만간 이득재 선생의 책을 다시 펼쳐봐야겠다. 어쨌거나 민법을 한참 뒤지다 보니 울적해진다. 바디우의 칼을 꺼내 들어야겠다.
"이상적으로, 정치는 '국가의 소멸'을 조직해야 하고, (중략) 사랑 또한 이상적으로 가족의 소멸을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바디우. "철학과 사건". p.85)
국가의 소멸, 가족의 소멸. 놀랍지 않은가? 사고의 전환, 용기 있는 행동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유한하게 닫힌 민법보다는 무한히 열려있어 유쾌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글의 주제로 다시 돌아가자. 할 일이 많다.
연애와 결혼이 공통적으로 소유욕과 연결되는 지점은 홀로서기의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어떤 형태로든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즉, 관계에서 소유욕은 홀로 있음과 불행의 동일시, 홀로서기의 두려움, 이 둘에서 기인한다. 이중 전자, 홀로 있음과 불행의 동일시는 앞서 얘기한 돈 없음과 불행의 동일시, 돈 있음과 행복의 동일시와 같은 모양이다. 다만 돈이 없는 것은 돈을 버는 것으로 해결 가능하지만 홀로 있음을 불행이라 여기는 것은 연애를 한다거나 결혼해서 같이 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결혼을 해도 늘 함께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 중에도 홀로 있는 시간은 늘 있을 수밖에 없고, 그만큼 그는 이를 불행이라 여길 것이며,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가 된 것 마냥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결혼까지 했는데 나는 왜 외로운가, 라는 의문에 괴롭기 때문이다. 화를 참지 못해 브런치에 다음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하겠지.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유>. 지랄이 풍년이다. 브런치에 올린 글로도 안되어 배우자에게 화를 쏟아내거나 우울감을 내비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화내는 것보다 우울한 게 낫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둘은 결국 같다. 우울한 것도 화내는 것 못지않게 슬픔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내는 것은 굵고 짧게 끝나는 반면 우울은 가늘고 길게, 늘어지기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그게 더 무섭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렇게 재앙의 서곡이 시작된다.
홀로서기의 두려움은 무슨 의미인가?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홀로 설 수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홀로 있음을 고독이라 하고 홀로서기를 독립이라 표현해보자. 연애나 결혼 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고독의 시간은 점차 늘어나고, 특히 자녀가 없는 맞벌이 부부라면 더욱 그렇다. 부부에게, 특히 젊은 부부에게는 독립이라는 것이 아주 낯선 개념이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무슨 독립인가 물을 것이다. 그럴 만하다. 독립이 낯선 개념으로 다가올수록 그 관계는 유아적인 의존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립은 단순히 물리적인 독립만을 말하지 않는다. 정서적인 독립을 뜻하기도 한다. 정서적 독립은 물리적 독립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아무리 물리적으로 가깝다 해도 정서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면 그 관계는 일방향이든 쌍방향이든 여전히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 자연인이 되어야 하는가? 고독의 투사, 독립의 투사가 되어 각자 산속에 작은 오두막으로 기어 들어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대신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의 공간 안에, 자신의 시간 안에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 그러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오두막에 구경도 가고 누군가 날 보러 오면 다정한 인사도 나눠야 한다. 소중한 시간, 소중한 사람이니까.
다만 밤이 찾아오면 나 혼자만의 오두막에 돌아와야만 한다. 고독을 벗 삼아 독립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오두막이 몹시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운만큼 타인이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타인도 그의 오두막도 존중할 수 있으며, 소중하고 존중하기에 결핍 너머, 소유욕 너머, 나라는 중심을 벗어나는 사랑, 너라는 항성을 중심으로 나라는 행성이 빙글빙글 공전하는, 진정한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소유욕은 나만 보는 것이다. 나 아닌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결핍은 나만 보는 것이다. 결핍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은 나만 보는 것이다. 외로움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나만 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어리석기에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언젠가 때가 오면 홀연히 일어나, 두발로 분연히 일어나 내 오두막에 불 질러야 한다. 니체의 말처럼.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그래서 재밌지 않은가?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소유의 조건부로 두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어떠한 조건에도 한정 짓지 않는다는 것은, 조건 짓고 소유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더 큰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한정이 없기에 삶은 그만큼 무한히 자유로움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신나지 않은가?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삶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는 것, 작은 나를 벗어나 더 큰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것은 이렇게나 낯설고도 즐거운 황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