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요구의 기억은 여섯 살이었다. 내 키보다 훨씬 깊은 수영장에서 난 아빠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잘 놀고 있다가 아빠가 갑자기 내게 헤엄쳐 오라고 하면서 아빠 어깨에 올린 팔을 빼 날 물속으로 내던졌다. 잔뜩 겁났다. 그때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요새는 흔한 구명조끼도 없었다. 물과 내 몸뿐이었다.
아빠에게 헤엄쳐갈수록 몸은 자꾸 물아래로 더 깊이 빨려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빠! 아빠! 연신 외쳐대며 아빠에게 가까워져 갈수록 아빠는 깔깔대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아찔한 그 순간이 생생하다. 손 뻗지만 이내 더 멀어지던 그 순간. 아빠가 손 잡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개헤엄을 쳤다. 물도 많이 먹었다.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그날 아빠의 귀여운 장난은,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죽음이 두려웠던 걸까?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나이에도 몸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던 걸까? 홀로 힘껏 헤엄쳐가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에 처음으로 닥친 실존적 위험 말이다. 아빠! 아빠! 손잡아줘! 날 죽게 놔두지 말아 줘! 이것은 요구가 맞다. 살고 싶은 나의 절실한 요구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요구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도 사실이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아빠에게 손잡아달라, 안아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첫 문단의 첫 번째 문장 "가장 오래된 요구의 기억은..."을 "가장 오래된 두려움의 기억은..."이라 써도 무방하다. 이때의 사건만으로, 요구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둘은 쌍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과격한 일반화는 아닌 건가 소심해지기도 한다. 다만 이 사건에서만큼은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아이의 특징이 요구라면 요구는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아이의 특징은 곧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두려움과 요구의 차이만큼이라 말할 수 있는가? 즉, 두려워서 요구할수록 아이에 가깝고, 두렵지 않아서 또는 두렵지만 두려움을 극복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요구할 것이 없을수록 어른에 가깝다 말할 수 있는가? 요구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두렵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두렵지만 그것을 이겨내려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려움이 요구를 만들기 때문에 두려움의 힘이 작을수록 요구 역시 작아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속에 내던져졌을 그때 내가 이미 수영을 잘했다면 나는 두려웠을까? 아빠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손잡아주지 않는 것이 두려웠을까? 아빠! 아빠! 외치며 손잡아주길 요구했을까? 수영을 할 줄 알았다면 난 두렵지 않았을 것이고 요구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헤엄쳐서 아빠에게 가면 되니까. 아빠에게 살려달라 요구하는 것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고 이는 물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수영할 수 있다는 것은 물과 죽음의 공포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것이므로 요구할 것도 그만큼 적다. 그렇다면 앞서 제기한 질문,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은 두려움의 차이만큼인가?" 역시 참일 수밖에 없다. 물이 두려워 손잡아달라 요구하면 스무 살이 넘었어도 수영장에서만큼은 아이임을 부정할 수 없고, 물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여섯 살이어도 수영장에서만큼은 어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무대를 수영장에서 삶으로 옮기면 어떤가? 같은 논리가 성립되는가? 삶, 진짜 삶, 즉 고통의 파도가 두려울수록 더 많이 요구하는 것이 아이의 삶인가? 덜 두려울수록 덜 요구하는 것이 어른의 삶인가? 고통의 연속이 삶의 진리이므로, 고통의 연속이 파도의 연속과 같다고 비유하면, 파도를 잘 타게 될수록 그만큼 두려움은 줄어드는 게 아닌가? 서퍼에게 파도는 두려움인가? 아니다. 놀이터다. 서퍼는 파도가 두렵지 않다. 그에게 파도는 언젠가 이미 한번 극복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파도가 더 높고 세찰 수록 서퍼는 재밌게 논다. 파도를 갖고 논다. 그냥 논다. 순수한 아이처럼. 서커스는 어떤가? 서커스단원들은 불을 뚫고 하늘을 날며 신나게 노는데 이를 숨 막히게 지켜보는 이는 관객밖에 없다. 클라이밍은 어떤가? 클라이머는 바위와 중력 사이 자신의 몸을 갖고 논다. 서핑이, 서커스가, 클라이밍이 관객에게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그들이 파도를, 불을, 하늘을, 바위와 중력과 신체를 두려워하고 그만큼이 그 시점에서 그들의 한계이기 때문 아닌가? 정작 서퍼나 서커스단원, 클라이머는 그것들이 두렵지 않은데 말이다.
두려움과 고통의 관계는 무엇인가? 두렵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느끼는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두렵다 느끼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 고통은 순전히 미래 시점 아닌가? 후자의 경우 현재의 고통이 가까운 미래에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는 것 아닌가? 재밌는 점은 두경우 모두 현재 시점보다 미래 시점이 우선시 된다. 어쩌면 현재의 두려움이란 관념은 미래의 고통이란 관념에 대한 관념적 방어기제로서 작용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긴 그렇다. 미래에 예상되는 해악을 현재에 더 적은 해악으로써 피하고자 하는 것에 한해 두려움이란 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소심함"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소심함은 두려움이고 두려움이 곧 소심함이다. 스피노자의 정의 역시 두려움은 미래의 관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두려움은 미래의 고통에 대한 현재의 관념적 방어기제라는 것 역시 틀린 말이 아니게 된다. 재밌는 건, 두려움의 시점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희망과 공포의 시점 역시 미래인 것처럼.
아무튼 수영장에서 그런 일을 겪은 뒤 나는 얼마 후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고 몇 년 후 학교 대표 선수까지 되었다. 그 뒤로 물을 무서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내가 그때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도 물을 두려워하고만 있겠지? 그만큼 물속에서 수영하는 그 자유로운 기쁨을 알지도 못하겠지? 그만큼 나는 덜 완전한 인간이 되었겠지? "물이 무섭기 때문에 수영은 안 배울 거야"와 "물이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배울 거야"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 그 선택 하나로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나? 반대로 생각하면 사소한 현재의 선택이 얼마나 크게 미래를 바꾸는 것인가? 그럼 사소한 선택이란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슬픔을 선택하면 시간의 선은 슬픔으로 방향을 틀고, 지금 기쁨을 선택하면 기쁨으로 방향을 튼다? 미래의 슬픔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기쁨을 포기하면 결국 슬픔으로 간다? 미래의 기쁨을 위해 현재 슬픔을 선택하면 결국 슬픔으로 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악착같이 기뻐야 미래에도, 아니 미래란 건 사실 없는 것이니까 그냥 지금 기쁘면 되는 거구나. 그걸로 된 거구나. 지금의 선택으로 지금 새로이 생성하고 지금 새로이 창조하면 되는 거구나.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내가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의 위상은 지금 필요할 때 잠시 꺼내 쓰기만 하면 되는, 거울과 같은 도구로서, 북극성과 같은 방향타에만 그칠 뿐이다. 즉, 현재만이 과거를 새로 쓰고, 현재만이 미래를 새로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이다.
어쨌거나 다시 정리해보면, 현재의 나는 과거의 선택과 우연의 주사위 놀이, 그것의 일시적인 결과이고 미래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우연의 주사위 놀이, 그것의 한시적인 결과이다. 들뢰즈가 말한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가 생각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지는 것,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우연과 필연이 한데 섞인 그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한시적인 결과를 돌아보고 다시 선택하고 행동하고 멈춰서 톺아보는 것, 선택과 행동과 멈춤의 반복, 그것밖에 없다. 선택과 행동과 멈춤의 무한한 반복, 그것은 음악이자 노래고 글이자 춤이다.
들뢰즈식으로 표현하면, 어쩌면 나는 선택-행동-멈춤-기계가 아닐까? 기계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는 관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계는 다만 선택하고 행동하고 멈추고, 다시 선택하고 행동하고 멈추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무한한 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그 무한한 주사위 놀이의 합, 그 무한한 반복의 총체적 구조가 불교의 연기법이고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의 주된 내용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두려움은 현재에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관념일 뿐이므로 현재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관념은 신체라는 물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하지만, 관념은 신체에 의존적이므로 관념이 신체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지금 슬픔으로 도망갈 때 두려움은 더해지고 지금 생성의 기쁨으로 살아있을 때 두려움은 작아진다. 생성의 기쁨으로 지금의 나를 채울수록 두려움도 슬픔도 줄어든다. 그러므로 결국에 나는 생성 그 자체, 기쁨 그 자체인 것이다.
오늘도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진다. 저 멀리 저 높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스피노자와 니체, 베르그손과 들뢰즈, 그리고 네가 내게 말한 것이 이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