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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Jun 09. 2023

잡문 4

글은 늘 첫 문장이 고되다. 특히 써야 할 게 무엇인지 모를 때 더 그렇다. 어떤 단어나 기억의 단편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붙잡고 끄집어 올려 하나의 그룹이라던가 작은 주제 같은 것으로 쉽사리 뭉쳐지지 않을 때 마음이 산란하다. 단어나 기억은 마치 무작위의 사진 한 장을 보듯 아직 해석되지 않았지만, 그룹이나 주제는 이미 해석되어 텍스트가 될 준비가 되었기에, 나는 그 상태에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아직 해석되지 않고 열려있음은 등 뒤에 벽 없이 선 상태이므로.



어떻게든 첫 문장을 뱉고 나더라도 직후에 찾아오는 모호함은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이어 나갈까? 컴컴한 동굴에 스스로를 가둬 손으로 단어 하나, 기억 하나씩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것, 동굴 끝에 내가 어디에 다다를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선을 이어 나가는 것, 끝에 무엇이 있든 받아들이려는 것, 이걸 모험심이라고 해야 할지, 탐구심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이것처럼 어렵지만 재밌는 것도 없다.



글 쓰는 시간 말고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베란다에 펼쳐둔 캠핑 의자에 앉아 나그참파 향을 맡으며 바깥세상을 들을 때다. 바깥을 보기엔 바로 앞 아파트 단지의 거대한 구조물이 가까이 있어, 볼 것이라곤 단지 내 도로를 따라 늘어선 키 큰 왕벚나무들과 은행나무들, 쓰레기를 버리러 가끔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택배 트럭들 밖에 없다. 하지만 눈을 감고 듣기 시작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멀리 지나가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 도로의 경적소리, 학교 끝나고 돌아온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이사 가는 집의 사다리차 오르내리는 소리, 윗집 애 아빠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그리고 새소리까지. 듣고 있으면 매번 다른 세계다. 오후 햇살이 다리를 감싸고 가끔씩 노트에 끄적이거나 책을 읽다 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만족감이 온다. 이러다 때론 잠에 들기도 하는데 깨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는, 기분 좋게 멍한 상태가 한동안 지속된다.



보는 행위는 선택적인데 반해 들을 때는 선택할 수 없다. 무작위의 것들이 무차별적으로 침투한다. 청자는 그중 일부만을 기호에 따라 선택하거나 편집할 수 없다. 그래서 듣는 것은 늘 유쾌하진 않지만 신선한 무력함의 경험이며 잘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연대순이나 원인-결과처럼 시간을 따르면 그 글은 읽기가 좀 더 수월하다. 그것이 인간의 이해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따르지 않는 글, 곳곳에서 피어올라 어느새 끊기고 부서지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재생되는, 그러니까 마치 지구의 지각 작용처럼 분화되고 융기되고 평탄화되고 다시 분화되고 침식되고 하지만 이다음에 무엇이 온다고 말할 수 없는, 어쩌면 무질서의 질서와 같은 형식이라면 독자에겐 난해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시다. 시는 시간 바깥에 있는 운동이다. 산문도 무질서의 질서가 가능할까?



싱어송라이터 친구가 노래는 글이나 그림, 여타 다른 것들과 다르게 물성 있는 결과물이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그러게, 그렇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지난 며칠 동안 이 주제는 머릿속 한편에 있었다. 노래와 춤은 반복재생이 안된다. 아무리 훈련된 사람이라도 매번 완벽하게 동일하긴 힘들다. 그 친구가 말한 내용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테다. 노래는 복부 저 아래쪽에서부터 끌어올라 기관지를 만나고 성대를 만나 공기 중으로 확산하는데, 몸을 벗어난 때부터 허공으로 사라지고야 만다는 것, 붙잡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어떤 허망함 같은 것이 그 '아쉬움'의 정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또 어디 있겠는가. 물성이란 것도 찰나의 감각적 만족이고 그것 역시 때가 다하면 사라지게 마련인 것을. 사라진다고 비탄에 빠질 것도 아닌 게, 노래와 춤은 오직 지금의 예술 아니겠는가. 글이나 그림도 마찬가지 아닌가. 글쓴이나 그린이 모두 오직 지금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이나 보고 있는 그림 모두, 작가의 지금과 나의 지금이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과 지금이 교차하는 순간, 아, 그래서 시간이라는 개념 역시 누구에게나 같아 보여도, 사실은 하나의 절대적으로 동일하고 규칙적인 선을 따르는 건 아닐 것이다. 축이 교차되고 중첩되고 쌓여 올라가는, 어떤 구조물, 그것의 연속체, 지구의 지층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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