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향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

by 정이든

바다다. 멀리 오른쪽 산등성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운전 중이라 응시할 수는 없었으나 흘긋흘긋 바다를 바라보며 반가움을 느꼈다. 요즘은 길이 잘 뚫려 있어 서울에서도 2~3시간이면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브런치를 먹어볼까 했었으나 미적거린 통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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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은 도시마다 특색이 있다. 다녀본 모든 곳이 좋았다. 속초는 여행지 느낌이 물씬 나고. 고성은 고즈넉하여 좋았다. 양양과 강릉도 각자의 특색이 있다.


지구상의 넓은 바다가 접해 있는 모든 해안면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바닷가 도시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획을 나누고 바다마다 특색을 살리려 노력한다.


스쳐 지나가는 동네사람1과 동네사람2에게 고유의 이름이 있듯이, 각 바닷가를 스쳐간 파도의 역사들은 실제로도 달랐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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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유년기를 바닷가에서 보냈다면 추억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바다에 뛰어들고 언젠가 물고기도 한 마리쯤 잡았을 것이다.


가끔은 동네 아저씨의 배를 얻어 타고 해안선을 유람하는 일상과, 친구와 젖은 옷을 입고 백사장에 누워 옷을 말린 후 어둑해진 골목길에 모래를 털며 집에 돌아가는, 평범하면서 특별한 나날들.


부모님께서는 작은 시골 항구 마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셨다. 가끔 해주시는 과거 이야기에 바다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 내가 그려본 낭만적 바닷가 생활은 공상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부모님의 고향에 갔을 때, 어시장의 비린내가 진동해 인상을 찌푸린 기억이 있다. 덕분에 바다에 대한 내 판타지가 과하게 발전하는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과 해수욕장에서 모래성을 만들 때, 그때 그 바다냄새는 오히려 상쾌하고 청량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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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바다는 특유의 냄새, 아니 향이 있다. 폐를 타고 넘어오는 습한 공기에 배어있는 짭조름한 냄새.


냄새, 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대비 압도적인 바다라는 공간, 또는 개념적인 존재를 폄하하는 것만 같아 불경함을 느낀다. 바다라는 압도적인 자연의 숭고함을 인정하고, 바다 너머 수평선 먼 곳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끝자락에 고고히 머물고 있을 바다의 향기까지 포괄하는 ‘바다향’이라는 표현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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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오면 새로운 공간에 온 기분이 든다. 육지와는 분명 다른 공간이다.


어느 육지에 끝이 있던가. 곳곳의 길은 어딘가로는 연결되어 있다. 막다른 길을 인공의 건물이 가로막고 있을 수 있으나, 뒤돌아보면 역시 어딘가로 연결된 길의 일부일 뿐이다. 육지에는 절대로 연결되지 않는 동떨어진 길은 없다.


하지만 바다는 애초에 길을 만들지 않는다. 부표를 띄우고 연결하여 길인 척해 본들, 흔들리는 파도 앞에서는 대략적인 이정표 이상의 것이 되기는 어렵다.


바다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길을 허용하지 않고, 깊음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가까이 보면 변덕스럽지만 멀리서 보면 한없이 공평하다.


바다에는 바다만의 고유함이 주는 경건함과 숙연함이 있다.


본질적으로 다른 바다의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을 가장 먼저 일깨워주는 것은 바다향이다. 네버랜드로 이끄는 팅커벨처럼 바다향은 내 존재의 실감을 이끈다. 뒤이어 무한한 파도 소리와, 거친 바람의 촉감이 바다에 온 것을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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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려 해수욕장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도심에서 몰고 온 각종 잡생각들이 바다향에 쫓겨 사라졌다. 순간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간에 집중한다는 것은 계속 떠오르는 사념에 집중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 장소, 시간, 기분, 분위기, 소리, 향기, 냄새,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 같은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바다까지 오지 않고도 내 고집스러운 평소의 경로에서 잠시 이탈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 마음수련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타고난 것인지 쉽지 않다. 대신 바다를 보고, 바다향을 맡는 순간을 빌려 나는 마음의 옷매무새를 고쳐 맬 시간을 가진다.


걸음을 잠시 멈췄다. 광활한 바다의 크기 앞에서 내 의식의 크기는 너무나도 작다. 하지만 덕분에, 내 편협함과 옹졸함이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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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가 져서 발걸음을 옮겼다. 차를 몰아 무작정 찾아 들어간 식당에서 순두부찌개에 두부부침을 시켜 먹었다. 엄청 특별할 것은 없는 칼칼한 찌개 본연의 맛이었지만 괜스레 바다향이 느껴졌다. 차를 끌고 오지 않았다면 두부부침에는 막걸리를 한 잔 곁들였을 텐데 아쉬웠다. 다음에는 더 바다향을 느낄 수 있는, 새콤달콤한 물회를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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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일상에서 떨어져 있어도 좋다. 물러서도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


또는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바다를 강박적으로 찾지 않아도, 눈을 감고 잠깐 심호흡을 하면 어딘가 먼 곳에서 이끌려 온 아득한 바다향을 맡을 수 있다. 그렇게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는 찰나마다 내 고유함을, 향기를 떠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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