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씨의 여러 찰나
날씨가 좋았다. 아니, 단순히 '좋았다'로는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상쾌함? 쾌적함? 아니 표현이 중요한가. 어떤 표현이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좋은 기분을 모두 담을 순 없을 것이라 병호는 생각했다.
이런 날에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병호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눈을 뜨고 일어나 생수병을 들고 물을 마시던 찰나에 창밖 쨍한 하늘을 보며 한 결심이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똑같은 직장으로 향하는 삶이다. 그런 삶이 뭐가 나쁘냐고 하면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병호는 루틴한 자신의 삶에 적잖이 만족해하고 있다. 얼마나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인지.
대기업 1차 벤더인 중견회사에서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병호는 월별, 분기별, 연간 마감 시즌이 아니면 적당히 칼퇴근할 수 있는 루틴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루틴한 것도 모자라, 월, 분기, 연간까지 루틴한 일상이다. 예측가능한 일상. 그 안정감이 병호에게는 무척 소중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병호는 너무 루틴한 삶을 사는 것은 왠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딱딱 들어맞는 디지털시계처럼 1초도 틀릴 이유가 없는 일상이 그에게는 무척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왠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주는 불편한 어떤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평소라면 그저 늘어져서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 겸 점심 (보통은 12시가 넘어서 먹으니 그냥 점심이 맞을지도 모르겠다)을 먹는 루틴을 살짝 비켜가 보기로 했다. 병호는 자신의 변죽을 통해, 한 주를 더 완벽하게 지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나서는 찰나, 병호는 자신이 마치 거장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느 화가들처럼 적당히 잘 그린 초상화를 그렸지만 마지막에 미간에 뜬금없는 점을 찍는다든가, 모더니즘스러운 뒷배경을 어지러이 넣는다든가 하여 '나는 당신들과 다르오' 하며 으스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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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라테 하나요. 연하게 부탁드려요."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동네 핫도그집에 들러 체다치즈 핫도그와 커피를 시켰다. 얼마 전 골목 모퉁이에 새로 생긴 작은 핫도그집 겸 카페였다. 뻔한 카페에서 뻔한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신상 동네 맛집에서 신선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잠을 못 들면 내일 출근이 어려우니 커피는 연하게 마시기로 했다. 병호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첫 손님이었다.
핫도그와 커피가 금방 나왔다. 카페 사장이 쌩긋 웃으며 트레이를 건네주었다. 사장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도 볼 수 있는 여성이었다. 병호는 사장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피부가 희고 잡티 없이 좋았고, 풍성하고 긴 생머리 때문에 젊어 보였으나, 적당히 달라붙는 청바지와 펑퍼짐하고 갈색 맨투맨이 어린 느낌을 상쇄하고 있었다.
카페 사장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조차 오늘의 병호에겐 묘한 만족이었다. 병호에게 오늘은 예측하기 어려운 날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도한 불확실성이나 사건사고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트레이를 받고 사장의 모습에 아리송한 그 5초 정도의 찰나에 느낀 무해한 불확실성으로 병호는 충분히 흡족했다.
핫도그는 소스가 많아 치즈가 적당히 꾸덕하고 소시지가 짭조름하여 맛있었다. 아이스라테는 양도 많고 얼음도 넉넉해서 가게가 썩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부지런하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만에 브런치를 먹게 된 기념비적인 날 아닌가. 병호는 사진을 찍어 핫도그와 커피 사진을 여자친구에게 보냈다.
- 부지런한 남자 어때?
답장은 없었다.
*
병호의 여자친구인 설미는 불규칙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항공사 부기장인 설미는 지금쯤이면 아마 태평양 상공에서 열심히 비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까지 가서 파일럿 자격증을 취득했다. 항공사 운행난으로 바로 취업이 안되어 2년 정도 계약직 행정업무를 보던 중, 친구의 소개로 병호를 만나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한 칵테일바에서 언젠가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을 밝히는 찰나, 병호는 설미의 폭죽이 터지는 듯한 눈빛을 보았다. 그 순간, 병호는 멋지다는 생각과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루틴하고 정해진 일상이 중요한 자신에게는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설미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설미라면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설미라면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인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를 찍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둘은 술을 진탕 마셨다.
*
병호는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밀린 미드를 보았다. 이리저리 스킵해 가면서 1시간짜리 두 편을 40분 만에 다 보고 나니 살짝 눈이 아팠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작은 핫도그집 4개 테이블에 사람이 가득 찼다. 다행히 웨이팅은 없어서 눈치는 덜 보였지만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았다. 병호는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그 찰나에, 한 손님이 카페 사장에게 컴플레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빵이 너무 탔어요, 사장님. 이거 보세요. 이 쪽이 아주 새까맣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해드릴게요."
아직 서툰 카페 사장이 아마 빵을 태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 핫도그는 괜찮았었나? 병호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적당히 맛은 있었으니 그렇게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어휴, 정말. 커피도 너무 쓰고. 참..."
이제 막 일어나려던 찰나, 손님의 목소리가 사장에게 닿을 듯 말 듯 병호의 귀에 스쳤다. 아마 들으라고 한 소리일 것이다. 조금 떨어진 병호의 귀에도 들렸으니 말이다. 사장은 다 듣고도 별말하지 않았다. 살짝 얼굴이 붉어져 보였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병호는 기분이 무척 언짢았다. 나름 완벽한 일요일의 일탈을 그 손님이 다 망가트려 버렸다. 빵을 태우고 쓴 커피를 내놓은 사장의 잘못도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쏘아붙일 것은 없었다. 좋게 얘기하면 될 것을, 왜 나의 기분까지 망가트리는 것인지.
병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잠시 여자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여자친구는 여전히 톡을 읽지 않았다.
- 카페에 진상 손님 있음. 어휴
- 보고 싶다. 도착하면 연락해!
병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카페를 나섰다. 아까 컴플레인을 한 손님을 살짝 흘겨보았다. 나는 맛있게 다 먹었다구, 하는 표정으로 사장에게 일부러 인사를 건넸다.
"잘 먹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뻔하고 짧은 대화였지만, 그 찰나 사장은 분명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핫도그를 새로 만들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병호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밖은 여전히 날씨가 좋았다. 날씨가 좋다는 것은 살짝 기분이 상한 병호에게 제법 위로가 되어 주었다. 여전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를 날씨였지만 카페를 들어가기 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상쾌함이나 쾌적함 보다는 김이 살짝 빠진 탄산수처럼 바람이 선선하달까, 고개를 좀 더 꼿꼿이 세우게 하는 쨍한 느낌이랄까, 하는 느낌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