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by 정이든

- 오, 선배님. 이걸 참으시다니. 역시 어른이시네요.


분명 자기가 실수했으면서 모른 척 넘어가려 하는 카운터파트가 있었다. 화를 낼 법도 했지만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고, 자주 볼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그냥 참고 넘겼다. 하지만 기분은 나빴으므로 표정에서 그게 드러났나 보다. 업무가 모두 끝난 후,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친한 후배가 나의 고생을 격려해 준다며 해준 말이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군가가 '어른'인지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어느 나이나 또는 시점이 되면 '자, 지금부터 어른입니다.'라고 누군가 정의를 내려준다면 편할 텐데. 그래서 성인식 같은 의식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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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축구공 하나로 밤 어둑해질 때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9살의 어느 날의 기억이 또렷이 떠오른다. 1km를 7분대로 느린 달리기를 하는 지금의 달리기와 그때의 뜀박질의 박자는 -비록 속도는 많이 다르겠지만- 여전히 똑같게만 느껴진다. 어른이 되었다기보다 그저 정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때 선배들이 '나도 마음은 20대'라는 류의 말을 하곤 하셨는데 조금은 그 기분을 알 것도 같다. 이제 당시 선배들의 나이를 넘었음에도, 아직 마음 한편에는 어릴 적 만화를 보며 몽글거리던 감성이라든지, 얼짱 각도랍시고 셀카를 찍던 그때의 자기애가 남아있다.


마음이 어느 시기에 머물러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지금의 나이와 무관하게 노인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가 되곤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강인하고 잘 이겨내는 듯 하나, 마음 깊은 곳에는 힘들었던 과거라든지 그리운 사람이라든지 상처받은 마음 같은 것들을 움켜쥐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연약하고 복잡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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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어른은 아니다. 특히 타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진짜 어른은 갈수록 희소해지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나를 포함해) 다들 자신의 입장만 꽁꽁 싸매고 다니는 시대에는 더욱 보기 힘든 덕목이다. 어른이라면 인내하고, 겸손하며, 나눠주고, 이끌어야 하겠으나, 그런 '찐'어른으로 불릴만한 어른들이 얼마나 있을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른'이라는 것의 정의는 시대가 바뀔수록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생각들도 모두 제각각이므로 우리는 '어른'이라는 단어가 명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재의 인류가 완벽히 공감할만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편의를 위해 단어를 생성하고 활용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어른'이라는 고정된 단어 이면에 내재된 어른에 대한 사회의 함의와 기대가 바뀌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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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쯤 전,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한번 써보려고 한 적이 있다. 구상만 하다가 현생에 치여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주인공: 30대 초반의 직장인 남성

대략적인 주제: 이제 어느 정도 사회에 정착하여 나름의 구실을 하게 된 나지만, 아직 정신 상태는 어른이 아닌 어린이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각종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른이 되어감

대략적인 스토리: 술 먹고 말실수한 이야기, 퇴사하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사는 모습, 커뮤니티에 댓글로 다른 사람이랑 싸우다가 씩씩대는 모습, 속물처럼 연애하다 차이는 이야기


좌충우돌 다이내믹하게 살던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의 일상을 소설로 쓰고, 또래의 또는 앞으로 내 나이대가 될 20대 사람들에게 '나이 든다고 다 어른 되는 거 아니더라'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이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지금은 아주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너무 실망하거나 너무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호르몬적인 변화인가 싶기도 하고, 열정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략적인 '어른'의 정의에는 가까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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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점은 이제 거의 둥글어져서 구르면 잘 굴러가는, 매끌매끌한 돌멩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투박하여 한 번 한 번 구를 때마다 힘을 꽉 줘야 넘어가는 어리고 울퉁불퉁한 원석보다는 개성이 없달까, 그냥 남들과 같이 휩쓸려서 구르기만 한달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

무엇이든 정답을 찾으려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남들이 다 구르니 나도 굴러야 한다고 순종하며, 오늘도 앞 구르기 뒷구르기를 10번씩 하며 모난 곳을 갈아내고 있다.


하지만 항상 얘기하듯이 인생에 절대적인 정답이 어디 있겠으며, 구르기 좀 못하면 어떠한가.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다들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관성에 못 이겨 구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남은 구르든 점프를 하든 그냥 있든 뭐라고 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각자 그냥 그렇게 사는구나 하고 내버려 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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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구르기도 하고, 이런 글도 써보면서 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끝없이 배우고, 실수하고, 또 일어서는 반복 속에서 '어른이' 소설을 조금씩 써내려 가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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