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동물의 일기

고기는 늘 옳다

by 정이든

고기는 늘 옳다.

맛있고, 소중하다.


최근 몇 년간 매일 최소 한 번은 육류를 섭취하고 있는 것 같다. 햄버거, 돈가스, 제육볶음, 간장불고기, 닭 한 마리.... 한창 운동을 열심히 할 때는 닭가슴살도 챙겨 먹었으니 어찌 보면 고기 없이 살 수 없는 육식동물인 셈이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나에게 섭취당한(?) 수많은 동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덕분에 아직까지 지구상에 몸뚱이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음, 막상 쓰고 나니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소름 돋는 말일 것 같다. 실컷 때려놓고 "맞아줘서 고마워" 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감사' 보다는 '미안'이 더 맞으려나. 암튼.)


*


재작년인가, 한 달에 한 번씩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맛집을 하나씩 정하고 그 맛집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한 팀원의 차례가 되었다. (편의상 팀원 A라고 하겠다.) A는 대박 맛집을 데려가겠다더니 당일 오전까지 식당을 비밀로 했다. 평소 주변 맛집을 잘 아는 친구였기에, 우리는 주변의 신상 맛집을 생각하며 엄청난 식사를 기대했다. 나는 아침 10시 30분쯤 꼭 배고픔을 못 참고 먹게 되는 간식도 건너뛰고 각종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어미를 쫓는 오리들처럼 A의 뒤를 졸졸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거 웬걸, 군침을 흘리며 A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계사 근처의 사찰음식점이었다. A는 매번 누구나 열광하는 맛집에는 이제 질렸다며, 오늘은 탈도파민적인 맛집에 가보고 싶댔나 뭐랬나. 나와 내 옆의 B는 흔들린 동공으로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A는 못 본 건지 못 본적 하는 건지 아무튼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정말로 모든 음식이 채소로 이뤄져 있었다. 나는 그래도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라면 고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부처님, 그리고 매일 수련에 정진하시는 스님들, 이렇게 가르침을 얻습니다.


나는 콩고기를 씹으며 '이건 고기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러다가 다른 팀원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도 나처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분명히 말하지만 사찰음식은 정갈하고 맛있었다. 한 번쯤은 꼭 먹어볼 만하다. 다만 미리 귀띔을 받지 못한 우리의 맛집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반면 예상치 못한 음식이었기에 상실감도 컸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그날의 점심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으니 의미 있는 점심이었던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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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제는 고기가 전혀 없는 식사가 잘 상상되지 않는다. 나도 가끔 샐러드를 먹긴 하지만 내 몸을 위한 의무감에 가끔 먹을 뿐이다. 완전히 고기가 없는 삶이란 삶의 즐거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느낌일 것이다. 아마 우울하고 기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려면 처음부터 치킨이나 삼겹살의 존재는 몰랐어야 한다. 이미 한입이라도 고기 맛을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세상에서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삶은 대단하다. 인간으로서 타고난 욕망 하나를 억지로 참고 사는게 아닌가?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채식주의를 선택하게 된 가치체계나 기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예전에는 냉장고에 남은 야채만 슥슥 양푼에 털어 넣고 비빔밥을 먹기도 했다. 가끔 보리밥에 열무를 비벼먹으면 별미다. 다만 요즘은 항상 고기가 넘쳐서 그런가 잘 안 찾게 된다. 수육이 없어도, 아삭하면서 양념이 눅진한 김치와 강된장만 있어도 충분히 맛있는데 말이다.


이런 생각이 떠 오른 것은 어제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 보면서 유해진 배우께서 너무 맛있게 닭고기를 뜯어 드셔서,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던 기억이 나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매일 고기반찬은 어려웠는데, 그 먼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고기 한번 먹어보고 싶었을까.


유해진 배우가 닭고기를 뜯어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사진을 못 찾아서 이거라도 ㅎㅎ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생물의 역사로 보면 매우 찰나에 불과하다. 유전자적으로 큰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 곳곳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지만) 고기가 귀해서 대체로 초식동물이던 인류가 이제는 고기가 넘쳐나 대체로 육식동물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대부분 먹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적당히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결핍을 느낄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가능하다 하여 소중함을 당연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당연한 것들에서 가끔 한 발자국 멀어져 보는 용기도 부려봐야 겠다. 내일은 샐러드를 먹을까? 봄이 슬슬 오는 듯 하니 나름 비빔밥이나 요즘 핫하다는 봄동 비빔밥도 괜찮겠다.


image.png 간만에 비빔밥 한 그릇 어떠신가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