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상황 속에서도, 고된 삶 속에서도 내가 나를 돌보는, 힘 나게 하는 나만의 비결이 있다면 써주세요. 그런 노하우로 힘든 시기를 잘 보낸, 보내고 있는 경험을 써주셔도 좋고요. 반대로 상황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어서 나를 돌볼 겨를 없이 의무와 책임감으로 버티고 견딜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나요? 그 시간이 내게 남긴 상처와 훈장에 대해 써주세요. <나를 껴안는 글쓰기> - 슝슝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다.
얼마 전 읽은 시를 통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리석은 마음으로 어쭙잖게 나를 구하려고 애썼던 흔적들이 떠오른다.
나 자신이 끔찍이도 미웠던 시기가 있다. 사람들의 권유로 다시 성당을 다니려고 해 본 적도 있다. 그런데 기도문 중에 아무래도 내 맘을 무겁게 짓누르는 구절이 있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나의 큰 탓이옵니다."라는 부분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말이었는데 기도와 함께 가슴을 두드리면 뭉툭하고 무거운 못이 가슴에 박히는 느낌이 들었었다. 나는 잘못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야말로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함부로 퍼붓던 사람들이 승리한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때의 나는 그들에게 존중받으면 나에게 구원이 올 것 같다는 이상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끊임없이 내리 꽂히는 비난의 화살을 회피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늘 잘못된 사람이었다. 잘못된 나를 벗어버리고 그들의 입맛에 꼭 맞는 사람이 된다면, 그들의 세계에서 인정받을 것만 같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지만.
사람들은 인생을 걷다 보면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웅덩이에 빠졌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인지했다. 그러나 볼모로 잡힌 일상 앞에서 다시 웅덩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혹은 그렇다고 합리화해왔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 내가 돌보았던 것은 비대해진 죄책감과 어떤 감정보다 앞서있던 수치심이었다. 웅덩이 밖을 기어 나와 소란스럽게 몸을 말리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스스로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웅덩이에 빠졌었고, 다시 일어나 빠져나와 걷고 있다.
깊고 축축한 그곳의 습기가 아직 덜 마른 상처부위에서 역하게 올라올 때가 있다. 그것이 곪지 않았는지 걱정스럽게 살펴보기도 하지만, 그저 부끄러워 숨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상처를 말리는 것이 부끄러워 다시 웅덩이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는 짓 따위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조금 호들갑스럽더라도 상처를 말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않는다. 상처라는 것은 으레 진물이 나고 아픈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는 조금 더 현명하게 나를 돌볼 수 있었으면 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수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확대하는 커다란 귀에게 휴식을 주겠다. 따뜻한 물에 조심히 상처를 씻어내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주겠다. 애써 몸을 말리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그리고 항상 명심해야 한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음을. 좋고 나쁨, 옳고 그름으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많은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므로,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