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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Jun 12. 2020

지구 359도를 돌고 온 후배를 마중 나갔습니다.

글 쓰는 딸과 시 쓰는 아빠 - 3. 사랑

‘누나 나 지금 너무 힘들어. 한국으로 다시 들어갈까?’

대학교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여자 친구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던 후배이다. 마침 내가 미국에 갈 때쯤 세계여행을 가서 너무나 부러웠었는데 의외의 연락이었다. 내가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는데, 그 후배는 여자 친구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동안에도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단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웃음이 났다. 나는 이렇게 답해줬다.

‘니가 힘들긴 하겠는데, 내가 더 힘들다. 나는 이혼 준비할꺼거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기적인 답변이다.


처음에 그 후배가 회사를 그만두고 여자 친구와 1년 동안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내 주변에도 이런 신기한 사람이 다 있구나 생각했다. 나는 후배에게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결심을 했냐고 물어봤었다. 그 후배는 “누나는 대기업 다니니까 쉽게 회사 그만 못 두겠지만, 나는 중소기업이니까 이거 그만두고 도전하더라도 이만한 직장은 또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였다. 이런 용기를 가진 아이가 이별을 힘들어하다니.



며칠 동안 후배는 연락이 없었다. 나의 힘듦이 수면제와 함께 조금씩 가라앉자 그 녀석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평소에 쓰지도 않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잘 지내냐고 연락을 했다. 시차가 있어서 인지 조금 늦게 답장이 왔다. 지금은 독일이고, 여자 친구에게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설득을 하면서 진심을 고백했다고 했다. 하지만, 설득은 실패했다고 한다. 여자 친구는 지금 옆에 있지만, 내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아이는 짐을 싸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한국에 돌아가서 그 사람을 보았는데, 혹시라도 내가 더 좋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단다. 그렇게 녀석이 보낸 텍스트를 보고  있던 내가 다 처참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후배에게 여행을 계속할 건지 물었다. 후배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한국에 돌아갈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상당한 인생 선배인 것처럼 그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니가 여행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고, 지구를 반 가까이 건넜는데, 지금 돌아오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나 같으면 억울해서라도 다 돌고 오겠다. 니 혼자 다니면서 다른 여자도 만나고 그럼 되잖아. 니가 한 바퀴 다 돌고 오면 내가 마중 나갈게. 일본으로 가면 되나?’ 정도의 어른스러운 말들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말뿐인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는지 여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생사를 확인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했다. 후배가 프랑스를 거쳐서 스페인, 아이슬란드에 있을 때, 나는 부모님 집에서 우울증과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병원을 다니고, 오빠의 카페에서 잔 심부름을 하면서 사회로 복귀할 훈련을 했다. 가끔 전화를 하면 그 후배의 배경으로 들려오는 외국어 웅성임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 후배가 남미로 이동했을 때 즈음 나는 회사에 복직했다. 부모님 댁이 있는 대구를 떠나서 수원 회사 근처에 있는 원룸 오피스텔을 구했다. 회사는 매우 활기차고,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선배들을 마주하니 너무나 행복했다.


이혼을 마음 먹었을 때 마음속 응어리들이 눈물이 되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회사에 복직하기 이전에는 이혼을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혼을 하면 맞서게 될 세상의 날카로운 눈과 입이 무서워서 선뜻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간 다음에는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서 이혼을 진행하기로 했다. 미국에 있는 전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에게 거리가 생기자 생각보다 냉정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마음속에 떠다니는 옛사랑의 기억들로 울먹일 때도 있었지만, 회사의 상담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비교적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대사관을 통해서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는 가정법원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다음 주 가정법원에서 연락이 왔고, 첫 번째 기일이 잡혔다. 여기서부터는 정신이 없어서 순서가 조금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 수 있지만, 있었던 일을 잠시 이야기해 보겠다.


먼저 첫 번째 기일에 여동생이 나를 데리고 법원에 가 주었다. 세상에 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참으로 많았다. 대기실에서 두 명씩 함께 앉아있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해외 거주자와의 이혼이어서 혼자 온 약간 특이한 케이스였다. 법원에서 판사님을 보기 전에 가정 전문 상담사 분과 대화를 했다. 왜 이혼을 결심했는지 이야기를 했다. 부부가 함께 온 분들은 오래 상담을 이어 나가기도 했지만, 나는 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3개월, 아이가 없는 가정은 1개월의 숙려기간을 가지고 다시 법원으로 출석하라고 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일을 마치고 나오니 가뿐했다. 아마 이유 없이 눈물범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동생이 옆에 함께 있어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것은 내 눈물이 새로운 씨앗이 되어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후에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괴로웠다. 나의 결정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법원을 다녀온 뒤 2주 정도가 지나고 세계여행 중인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하와이라고 한다. 벌써 지구 한 바퀴를 다 돌아가는 후배가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 후배의 기운을 조금이라고 받고 싶었는지, 아니면 최종 기일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농담처럼 했던 일본으로 마중 나간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오랜 혼자 여행에서 외로웠는지 후배도 반겨주었다. 최종 기일을 앞둔 주말 나는 일본으로 세계 여행을 마친 후배를 마중 나갔다.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4월이 시작하던 때였다.


우리는 사케를 진탕 마시면서 누가 더 멍청한 사랑을 했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못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후배는 한국에 돌아가면 전 여자 친구를 다시 봐야 하는데, 여전히 좋으면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라고 했다. 옛사랑이 외국에 있어서 볼 일이 없는 내가 차라리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한 후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누나, 사람이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한눈도 팔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가? 그 아이도 나중에 내가 진짜라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잖아. 우리 아빠도 그런 적 있었는데.”


“니는 엄마가 그렇게 맘고생하시는 거 옆에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내가 니 엄마면 진짜 마음 찢어질 것 같다. 잠깐의 바람이라도 당하는 사람은 잠깐만 아픈 거 아니다. 문득문득 계속 아픈 거다. 니가 왜 그렇게 아파야 하는데!”


사람이 술을 마시면 내 이야기부터 아는 사람의 가족사까지 안주로 다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에, 내가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사람이 어릴 때 엄마가 술집 같은데로 자길 데리고 가더래. 그러고는 거기 소파에다가 본인을 집어던지면서 가게에 있던 사람들한테 그 여자 나오라고 하라면서 소리를 질렀데. 바람피울 거면 얘도 데려가서 키우라고 했다더라고. 내가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아나. 바람피우면, 그 사람 말고 주변 사람들도 다 다치는 거다. 초등학교 때쯤이라고 했는데, 애가 얼마나 놀랐겠노. 니는 진짜 지금 끝낸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지금 이렇게 끝난 것이 나도 천만다행이고, 그 후배 녀석도 천만다행이다. 나는 술을 이렇게 진탕 먹고 퉁퉁부은 얼굴로 한국으로 들어왔고, 후배는 1주일 정도 여행을 더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벚꽃은 낮술의 안주가 되었다.



술을 먹고 기분이 상당히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을 가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여동생이 아니었으면 나는 가는 도중 어딘가에서 펑펑 울었을 것이다. 여전히 법원에는 많은 커플들이 이혼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노부부도 있었다. 주변이 보일만큼 정신이 조금 돌아왔나 보다. 내 차례가 되어서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 안에는 방이 꽉 찰 정도의 큰 테이블이 있고, 판사님과 어떤 다른 한두 분이 계셨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판사님께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확인서 같은 것을 줬는데, 동사무소에 그것을 제출하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셨다. 나는 동생과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이제 끝이다. 후련하면서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일 년 정도 지나서 이런 일들이 일상에서 잊힐 무렵 아빠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문장 21에서 시인으로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총 4편의 시가 실렸는데, 나는 그중 한 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걱정이라는 시였는데, 내가 후배에게 해주었던 ‘바람피운 아빠를 엄마와 함께 쫓아갔다 상처 받은 소년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 아빠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빠가 간성 혼수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웅얼웅얼하실 때 내가 들었던 이야기였나 보다. 어쨌든 후배의 어떤 걱정도 사라져서 참 다행이다.


사랑 걱정은 이혼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엇갈림 일 수도 있지만, 모든 걱정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지독하게 아프다. 지독한 사랑의 아픔은 흉터가 되기도 하고 기억이 되기도 한다. 지독한 아픔을 이겨내고 그 흉터가 나를 구성하는 하는 그냥 작은 요소가 되도록 도와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도 깊은 사랑을 느낀다. 






어떤 걱정

          - 이영배


김천 오일장 소 팔러 가신 아버지

취해서 찬바람 덥고 주무시나

건너 숲에서 올빼미 울고

신작로길 어머니 눈 빠지도록 기다린다


맞잡은 장남 손 싸늘하고

스치는 자동차 불빛

발자국 옮길 때마다 사납게 달려든다


읍내 정다방 나를 앞세워 들이닥친다

마담은 내빼고 없고

어머니 숨소리 유난히 거칠다


그날 밤

밤새도록 도망 다니다 자주 깼었고

내내 어머닌 끙끙 앓으셨다


우리 집 걱정거리

다음 날 아침에도 보이지 않고

군청색 중절모 남방만

감나무 밑 평상에 널브러져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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