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지옥철(지옥 같은 지하철)의 풍경을 바꿔준 것은 책이었다. 2022년부터 매일 조금이라도 독서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매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해가 들어올 때도 있었고, 좀이 쑤셔 앉아 있기 싫은 날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찾은 방해받지 않는 최적의 장소가 지하철이었다. 2023년, 나는 출근과 퇴근, 각 20분 정도 지하철에서 독서를 시작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백팩을 앞으로 메고, 책을 꺼낸다. 문이 열리면 우선 양발을 꼭 붙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출퇴근 시간에는 자칫 잘못하면 양발을 편안하게 바닥에 붙이지 못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책을 백팩을 윗부분에 올려 펴고 독서를 시작한다. 그러면 사람으로 빼곡하던 지하철에서 나만의 공간이 생긴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여기저기 치이기는 하지만,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 보면 그 괴로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루틴이 자리를 잡으니 책을 천천히 읽는 내가 1주일에 책 한 권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023년이 지나갔다.
나는 지하철 독서를 통해 총 54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읽은 책들을 틈틈이 인스타에 올렸고, #지하철독서라는 태그를 달았다. 어느 순간 북스타그램이 되어버린 나의 인스타그램이다. 피드를 쭉 내려보면 스스로 참 잘했다고 칭찬하게 된다. (그중에서 5권 정도는 완독을 하지 못했지만, 나는 나에게 관대한 편이므로 '독서했다' 목록에 그 책들도 추가했다.)
나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한 권을 읽은 후에 그와 관련된 다양한 다른 책을 읽기도 하고, 책 속에 인용된 책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는 것도 재미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싶을 때는 자기 계발서를 읽고, 힐링을 하고 싶을 때는 소설을 읽는다. 아주 사소한 변화이지만 하루의 느낌을 좌우하는 데는 충분하다.
2023년에는 특히 철학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이란 무엇이며, 관계란 무엇인지 더 많은 생각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삶의 의미를 더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고르라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고를 것이다. 영문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이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을 풀어내면서 시작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의 생활, 인간의 존엄성이 당연한 것이 아닌 사람들, 그런 속에서 감정과 감각이 사라지는 것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모든 신체적 자유를 빼앗긴 환경 속에서도, 마지막 하나, 스스로의 생각만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책의 뒷부분에는 해방 이후 저자가 대학에서 가르친 로고 테라피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세상을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혜가 담긴 책이다. 읽는 내내 책 전체가 따뜻하게 열과 빛을 내는 듯했다.
올 해는 또 어떤 책을 만나게 될지 벌써 설렌다.
내일도 지하철에서 양 발 당당히 중심을 잡고 서서, 책을 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