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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Aug 08. 2021

눈의 여왕

마음의 파편

좋아요, 처음은 여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이야기해야겠어요.


눈의 왕국의 여왕은 겨우 열네 살에 왕이 되었죠. 불행한 일이었어요. 어쩌다 부모님께서 사고를 당하셨으니까요. 그녀는 눈처럼 하얀 피부와 북극곰처럼 또렷하고 까만 큰 눈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별처럼 아름다운 황금색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라'였어요. 꽃이 없는 눈의 왕국에서도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셨죠.


그러니까... 플로라가 왕이 된 지 벌써 3년이 지났네요. 그녀는 슬픔을 이겨내고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해냈어요.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손이 안 가는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거든요. 다만, 너무 잘 해내는 것이 문제였을까요? 무엇이든 묵묵하게 하는 그녀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녀는 왕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옆에서 함께 잠을 자는 북극여우뿐이었답니다.


며칠 전 플로라는 갑자기 부모님이 너무 그리워졌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죠! 부모님께서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방이 말이에요. 부모님은 그 방에 한 번씩 다녀오셨지만, 플로라는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조금 더 크면 함께 가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는, 절대로 함께 하지 못하셨죠.


모두가 잠든 사이 플로라는 그 방 앞에 섰습니다. 심호흡을 세 번 크게 하고는 문을 조금씩 열었어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문에서 작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방은 특별히 다르지 않았어요. 벽난로가 타오르는 안락한 방 한가운데에는 소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앞에는 특이하게 생긴 거울이 있었어요.


그 거울은 창밖의 오로라와 같이 초록색인지 보라색인지 모를 빛들을 조금씩 내고 있었죠. 조금씩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플로라는 거울로 다가가 물끄러미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거야?"

라며 거울이 소리쳤어요.


깜짝 놀란 플로라는 뒷걸음치며 넘어졌어요. 그 거울은 약한 마음의 소리를 아주 크게 보여주는 거울이었거든요.

거울은 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어요.

"난 지금 울고 싶어! 너무 혼란스럽다고! 난 혼자야! 혼자서 밤하늘에 눈 구름을 만드는 일은 정말 끔찍하다고!"

깜짝 놀란 여왕이 거울의 말에 대답했어요.

"아냐! 난 울고 싶지 않아. 난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그리고 그만 얼음의 마법을 사용해 버리고 말았어요.


강력한 마법으로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던 따뜻한 방은 얼음으로 뒤덮였고, 마법의 거울은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 내렸습니다. 마치 은하수에 콕콕 박혀있는 별처럼 꽁꽁 언 바닥에 거울 조각들이 떨어져 반짝반짝 빛을 냈어요. 그리고 조각들은 저마다 조그마한 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말았어야 했어.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사람이야."

"다들 나에게 왜 그러는 거야?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미워하면 나도 같이 미워할 거야."

"이곳에서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나는 정말 나쁜 딸이었어."


눈의 여왕은 거울 조각들의 속삭임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어요. 왕은 울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며 간신히 울음을 참았어요. 그리고 "후!"하고 큰 한숨을 내쉬며 부서진 거울 조각들을 창문 밖 세상으로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조각들은 밤하늘의 오로라 속에 섞인 채 저마다 재잘거리며 세상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버렸습니다.







이제 잠시 여왕의 성을 떠나 어린 시절의 게르다와 카이의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여왕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계절을 가진 작고 예쁜 마을이 있었어요. 그 마을에는 게르다와 카이라는 남매처럼 사이가 좋고 귀여운 아이들이 살고 있었어요. 게르다는 여자아이고, 카이는 남자아이였어요. 두 아이는 서로 옆집에 살았답니다. 초록색 지붕을 가진 2층 집에는 게르다가, 붉은색 벽돌집 2층에는 카이가 살았죠. 협소 주택인 이 집들은 무척 가까워서 서로 창문을 열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두 집 사이에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었습니다. 카이의 할머니는 그 화단에 꽃을 심기도 하고, 조그마한 채소들을 심어 텃밭을 가꾸기도 했어요. 두 집의 사이가 어른의 큰 한걸음이면 끝이 닿을 만한 공간이었지만, 두 아이들에게 훌륭한 놀이터이지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장미였어요. 햇살이 예쁜 초여름이 되면 카이네 집의 붉은 벽돌을 타고 올라간 장미 덩굴이 할머니가 만들어준 종이 박스 다리를 건너 게르다네 집까지 꽃을 피웠습니다. 두 아이는 장미꽃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무당벌레의 등보다 더 빨간 장미를 찾는 놀이를 할 수 있었죠.


그러던 어느 봄의 저녁이었어요. 벌써 4월이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했어요. 하늘은 가끔씩 이렇게 변덕을 부리죠. 저녁을 먹고 창밖을 내다보는 두 아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눈송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거든요. 봄에 내린 눈으로 장미 덩굴이 모두 얼어버린다면 정말 큰일이에요.


결국 두 아이는 집에서 가장 튼튼한 박스들을 가지고 화단에 모였어요. 장미덩굴들이 눈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한 박스 집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습니다. 깜깜한 밤이라 가로등도 희미하고, 내리는 함박눈 때문에 작업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환경도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놀이였어요. 장미 덩굴을 덮어줄 박스 집을 꾸미고, 눈덩이를 크게 굴려 눈사람을 만들어 그 옆에 세워주었습니다. 혹시라도 장미 덩굴이 심심해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때 조금 먼 곳에서 카이와 게르다 또래의 다른 아이가 있었어요. 눈처럼 하얀 피부와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아이는 할머니가 오래전 프러포즈 때 선물로 받으셨다는 보석 반지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흥미롭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게르다가 그 아이를 발견한 것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눈사람의 몸통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뒤였죠.

"안녕? 너도 같이 놀래?"

게르다가 말했어요.

카이도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면서 그 아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우리는 눈 사람의 얼굴을 만들 돌이 필요해. 이리 와서 같이 찾자."

 

눈처럼 하얗고 창백한 아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예쁜 조약돌 2개를 주워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우와~ 너 돌 엄청 예쁜 걸 찾았구나! 우리 눈사람의 눈으로 딱이야!"

"이 나뭇가지들로는 코와 입과 팔을 만들자."

세 명의 아이는 눈사람 꾸미기에 매우 신이 났어요.

다 꾸며진 눈 사람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죠.


"그런데 이 옆의 상자 집은 뭐야?"

그 아이가 물었어요.

"이건 우리의 장미를 위해 지은 집이야. 이제 곧 여름이 되면 예쁜 꽃이 피기 시작할 거야. 그때도 여기 와서 같이 놀자."

게르다가 말했어요.


그때 어디에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플로라~ 어디 있니? 이제 가자."


"나는 이제 가야겠어. 너무 즐거웠어!"

그렇게 아이는 떠나고, 눈송이는 점점 작아졌어요.

게르다와 카이는 안심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침실에서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마을에는 다시 무당벌레가 돌아왔어요. 장미도 피어나기 시작했죠. 이제 제법 자란 아이들은 텃밭에서 여느 때처럼 장미 덩굴을 위한 박스 사다리를 만들고 있었어요.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를 위해 나무 의자도 만들어 두었지요.


"아, 눈이 따가워!"

갑자기 카이가 소리쳤어요.

"어디 한번 봐봐. 이리 와 봐"

게르다가 카이의 눈을 봐주기 위해 다가갔어요.

"아냐 괜찮아. 일단 집에 가서 쉴게."

카이는 눈을 감싸 쥐고 재빠르게 방으로 올라가버렸습니다.


카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카이의 눈에 들어간 것은 작은 마법의 거울 조각이었어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마법의 거울은 마음속에 있는 약하고 부정적인 소리를 아주 크게 보여주죠.

카이의 마음속 외침들도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날부터 카이는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속으로는 '어차피 내가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죠. 함께 축구를 하자는 친구들의 이야기에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난 달리기도 느려서 축구하는 거 부담스러워. 게다가 우리 팀이 져버리면 다 내 탓이 될 거잖아.'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요.

걱정이 된 게르다가 이것저것 물어보아도 아주 짧은 단답형으로만 대답하고 집으로 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어요. 카이는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게르다는 카이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집으로 찾아갔어요. 할머니가 구워주신 고구마와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카이의 방에 올라갔지요.

"잘 지냈어? 올 겨울에도 눈이 많이 온다고 하더라. 올해도 장미에게 집을 만들어주자."

게르다가 신이나 말했어요.

"그렇게 까지 안 해도 장미는 필 거야. 작년에도 폈고, 올해도 피고, 내년에도 필 거라고! 그리고, 장미가 더 많이 피면 뭐가 달라져?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이 좁아터진 집이 커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카이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건 그래. 그래도 할머니가 장미가 가득 핀 텃밭을 좋아하시잖아. 우리도 좋아하고. 혹시 많이 피곤한 거야? 오랜만에 왔으니 난 고구마 하나만 먹고 집으로 갈게. 할머니가 아주 맛있게 구워주셨어."

두 아이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구마와 우유를 먹었어요. 그리고 게르다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겨울의 햇빛은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어서 게르다의 뒷모습이 더 쓸쓸해 보였어요.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게르다를 화나게 했어. 하지만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그래도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가? 역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훨씬 나아.'

게르다가 돌아간 후에도 마음속 소리는 카이를 혼란스럽게 하였어요.


며칠 뒤 마을에는 큰 눈이 내렸어요. 게르다는 화단으로 가서 장미의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게르다도 예전보다 많이 자라서 혼자서 장미에게 집을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 작업은 전처럼 즐겁지 않았어요. 게르다가 박스를 만지작 거리는 소리에 카이는 창 밖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말았어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쩌겠어요. 카이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걸요.


밤 사이 눈송이는 점점 더 굵어졌어요. 어떤 눈송이들은 아주 큰 목화솜 덩어리 같았어요.

카이는 커튼을 걷고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았습니다. 짙은 구름이 덮인 밤하늘은 짙은 남색이던 이전의 하늘과 다르게 먹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빨간 벽돌에 세모로 잘 기울여 쌓아 놓은 장미의 집 위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습니다.


갑자기 카이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낸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니 더 눈물이 났습니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물이 계속 차올라서 차가운 창문을 따라 흘러내렸어요.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마음이 아프고 자신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져서 슬펐어요.


한참을 울던 카이가 눈을 떴을 때, 창문에 흐른 카이의 눈물자국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어요. 그 속에는 얼음으로 만든 큰 방이 보였죠. 눈에 박힌 마법의 거울 조각이 어떤 마술을 부린 것 같습니다. 손을 가져가자 마치 세면대에 받아 놓은 물처럼 눈물자국이 번지면서 물결을 만들어냈고, 카이의 손은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공간 속의 손은 차갑고 싸늘했지만, 카이에게는 위로가 되는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다.


카이는 그렇게 눈물 자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카이가 눈물 자국을 지나 들어온 곳은 온통 얼음으로 꽁꽁 언 큰 방이었습니다. 큰 창문에 달린 커튼조차 흔들리던 모습 그대로 얼어있었죠. 벽난로 속의 장작도 불이 타 오르던 그 모습 그대로 얼어있었습니다.

카이의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너무 추워서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어요. 카이는 방 문을 열고 깜깜한 복도로 나왔습니다. 저 멀리 새어 나오는 빛을 보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카이가 눈을 떴을 때, 얼음처럼 창백한 피부와 정반대로 어울리는 까만 눈동자의 소녀가 카이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곱슬곱슬한 소녀의 금색 머리카락은 얼음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지만, 깊은 까만 눈에는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아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과 같았어요. 처음 들어온 방과 다르게 이곳은 꽁꽁 얼어있지는 않았어요.


"어때? 추위는 좀 가라앉았니? 심장에 얼음 마법을 걸어두었어. 너무 늦지 않게 널 발견해서 다행이야."

소녀가 말했습니다.

카이는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지만 소녀를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고, 고마워요! 여기는 어디죠?"

카이는 이상하게 아무런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소녀에게 물었어요.

"여긴 스핏스베르겐, 눈의 왕국이야. 나는 이곳의 왕, 플로라고. 저 구석의 소파는 아무도 쓰지 않으니 편하게 쓰도록 해. 편하게 이 방을 나가도 좋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마. 마법의 기운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정말 얼음 덩어리가 되어 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플로라는 방을 나갔습니다.


카이가 방구석으로 눈을 돌려보니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보드랍지도 깔끄럽지도 않은 짙은 초록색의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소파가 있었습니다. 카이는 그곳에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는 할머니와 게르다는 무지개 위를 걸어 다니면서 장미 씨앗을 심었고, 장미들은 정말 빠르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고, 무지개는 오로라로 변했습니다. 할머니와 게르다는 오로라가 속삭이는 밤하늘을 사뿐사뿐 걸어 다니다가 사라졌습니다. 무지개 위의 장미꽃들은 예쁜 눈송이로 변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카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게르다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소파가 있는 방을 나와 복도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죠.


복도를 지나 중앙에 있는 큰 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들은 웃음을 띄고 가볍게 목례만 할 뿐 카이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카이는 원래부터 그곳에 그렇게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듯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욱 카이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어요. 카이는 보통 중앙에 있는 큰 홀에서 창밖의 눈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돌아오면 인사를 하고 초록색 소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카이가 눈의 왕국으로 간 다음날 할머니는 방에 카이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죠. 몸이 불편한 할머니는 게르다의 집으로 가서 카이가 사라졌다고 알렸습니다. 게르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카이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어요. 할머니는 너무 슬퍼 울다 지쳐버리셨죠.


이 추운 겨울에 카이가 어디로 간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밖에 쌓인 눈이 녹지 않으면 카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죠. 마을 안쪽 길들을 빼고는 눈이 어른 허리 높이만큼 높게 쌓여 있었어요. 그러니 마을 밖으로 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죠. 게르다는 며칠을 카이의 발자국을 찾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계속 내리는 눈은 카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까지 덮어버렸죠.


게르다와 할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카이를 찾아다녔지만 카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눈이 녹고 봄이 왔지만 카이의 소식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카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죠. 하지만 게르다는 쉽게 카이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더욱이 게르다는 카이가 사라지기 전날 밤, 슬픔과 짜증에 섞여 자신에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분명히 카이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카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기 위해서는 단서가 필요했어요. 게르다는 카이의 방에서 단서를 찾아보려고 했죠. 오랜만에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더니 약간의 먼지 냄새가 났어요. 커튼을 활짝 젖혀서 열자 창밖으로 눈부신 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그때 게르다는 창문에서 카이의 실루엣을 발견했어요. 그 실루엣은 눈물 자국과 비슷한 얼룩 속에서 비치는 것이었어요. 바깥은 봄이 와 아주 따뜻해 보였지만, 카이가 있는 곳은 아주 추워 보였습니다. 카이는 멍하니 앉아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반가워서 카이의 이름을 여러 번 외쳐보았지만 카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어요. 실루엣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손이 얼룩 사이로 쑥 들어갔습니다. 약간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어요. 저곳에 카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희망으로 벅차올랐습니다.


게르다는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 할머니에게 갔어요.

"할머니! 할머니! 카이는 살아있어요. 카이의 방에는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어요! 제가 그곳으로 가서 카이를 데려올게요."

할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눈의 왕국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할머니는 그곳이 매우 추우니 겨울 옷을 챙겨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게르다는 지금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말씀에 따라 준비를 하고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배낭에 할머니가 떠주신 빨간색 스웨터를 넣고, 가장 일찍 봉오리가 맺힌 장미꽃, 텃밭의 봄 향기를 가득 담 작은 병을 챙겨 넣었어요. 할머니가 싸주신 간단한 간식은 작은 주머니에 넣어 가방의 가장 앞쪽에 챙겨 넣었어요.


짐을 모두 싸고는 할머니와 함께 2층 카이의 방으로 올라갔어요.

"할머니 제가 꼭 카이를 데려올게요! 걱정 마시고 건장 잘 챙기고 세요!"

"그래. 생각보다 오랜 여정일 수도 있으니 너희가 돌아올 때까지 많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눈의 왕국의 왕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왕국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눈 괴물들을 두어 성을 지킨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조심히 다녀오렴 게르다."


게르다는 할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카이가 보이는 얼룩 속으로 들어갔어요.









게르다가 처음 도착한 곳은 카이가 도착한 얼음으로 뒤덮인 방이 아니었습니다. 얼룩 속에서 보이던 눈 오는 하늘은 전혀 보이지 않고, 봄의 꽃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너른 들판이었습니다. 꽃잎이 흔들리면서 내는 사각 거리는 소리와 들판 옆으로 흐르는 시원한 냇물의 소리는 멋진 화음을 내고 있었어요.


'시작이 좋은걸!'

게르다는 살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시원한 냇물이 시작되는 곳에는 눈이 소복하게 덮인 작고 예쁜 언덕이 보였습니다.

'그래 저기야!'

게르다는 그곳에 카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냇물을 따라 언덕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할머니가 싸주신 간식을 먹으며 기분 좋게 걸었어요. 그러다 밤이 오면 풀밭에서 안전한 공간을 골라 자리를 잡고 누워 밤하늘을 보며 잠이 들었어요.


3일이 지나자 할머니가 싸주신 간식이 거의 다 떨어졌어요. 게르다가 냇물을 흉내 내며 부르던 콧노래도 사라져 버렸죠. 다리는 퉁퉁 붓고 발은 아팠어요. 그런데도 눈이 덮인 언덕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아주 멀리 있었는지 모르죠.


게르다는 풀밭에 앉아 할머니가 싸주신 간식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은 빵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걸 다 먹으면,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겠지? 이틀 동안 나눠서 먹을까... 그전에 카이가 있는 성으로 가는 빠른 방법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게르다는 너무 배가 고팠지만, 선뜻 남은 빵을 먹지 못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때, 풀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자세히 보니 주변의 연두색 풀들과는 다른 옅은 노란 빛깔의 털이 보였습니다.

"안녕? 넌 누구니? 혹시 너도 배가 고프니? 마지막 빵이 남았는데, 같이 먹을래?"

게르다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풀 속에서는 옅은 황금색 털을 가진 여우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습니다. 이 부근의 여우들은 대부분 털이 붉은색이었는데 그 여우는 달랐어요. 발 끝부분도 검은 털이 없었고, 까만 눈과 코를 제외하면 모두 옅은 금색을 띄는 통통하고 귀여운 여우였습니다.

여우는 약간 경계를 하듯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게르다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자! 이거 먹어."

게르다는 손으로 빵을 툭 잘라, 그중에서 큰 조각을 여우에게 건넸습니다. 여우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빵을 물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빵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게르다도 풀밭에 앉아 할머니가 싸주신 마지막 빵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래, 내일부턴 주변을 잘 살펴서 열매라도 따 먹어야겠어.'

복잡하던 게르다의 마음도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습니다. 하늘에는 드넓게 양떼구름이 펼쳐져 있어서 게르다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조금 뒤 여우는 게르다의 배낭을 입으로 물더니 게르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총총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게르다는 여우를 따라서 풀밭을 걷기 시작했어요.

한참 뒤 게르다와 여우는 과수원 앞의 작은 집에 도착했어요.

"넌 정말 착한 여우구나! 나에게 마지막 빵이라는 것을 알고 친절하게 여기까지 데려다주었어!"

게르다가 여우를 꼭 안아 얼굴을 비비면서 말했어요.

여우도 완전히 싫지는 않은지 약간 뻣뻣하게 고개를 든 상태에서 게르다에게 안겨있었습니다.


"어머! 손님이 왔네? 이게 얼마만이람."

기뻐하던 게르다의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어요. 뒤를 쳐다보니 어떤 건강하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이 광주리를 옆에 끼고 집으로 오고 계셨어요. 광주리에는 과수원에서 바로 딴 듯한 싱싱한 체리가 잔뜩 놓여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게르다라고 해요. 저기 눈의 왕국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고 있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게르다는 저 멀리 보이는 눈 봉우리를 가리키면서 말했어요.

"그럼, 알려주다마다. 그전에 너는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게르다라고 했지? 잠시 들어와 방금 딴 체리라도 먹고 좀 쉬었다가 가려무나."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나무로 만든 예쁜 문을 열어 집 안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집안은 특별하진 않지만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오크나무로 만든 무늬가 예쁜 작은 식탁에는 손으로 뜬 듯한 포도무늬의 하얀색 식탁보가 깔려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나무 쟁반 위에 방금 딴 먹음직스러운 체리를 올려두고, 여우에게 줄 체리도 한 움큼 씨를 빼서 그릇에 담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자, 게르다.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해 보려무나.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지?”


게르다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할머니에게 털어놓았어요. 지금은 카이를 찾고 있고, 눈의 왕국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요. 카이를 만나면 주고 싶어서 챙겨 온 봄의 향기와 장미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요, 이제 곧 장미가 활짝 피어 시들어 버릴 것 같아요. 꽃이 시들기 전에 카이를 만날 수 있겠죠?”

게르다가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꽃과 풀과 나무들을 돌보아 왔단다. 내가 그 꽃을 시들지 않게 예쁜 병에 담아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리고 우리는 더욱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꽃을 이리 주고, 얼른 맛있는 체리나 먹어보려무나. 내가 그동안 그 꽃의 시간을 그대로 멈춰 있도록 마법을 걸어줄 테니.”

그 말을 들은 게르다는 할머니에게 얼른 장미를 건네고, 허겁지겁 체리를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장미를 가져가 예쁜 병에 넣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법을 걸었습니다.


사실 할머니는 엄청난 마법사였어요. 나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어서 심심했기 때문에 말동무가 필요했죠. 이 마법사는 따뜻하고 활기찬 게르다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게르다가 이곳에서 좀 더 함께 머무르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체리에도 마법을 걸어두었답니다. 게르다가 카이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요.


게르다는 체리를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어요. 체리 알을 한알씩 입에 넣어 깨물 때마다 카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사라지고, 한 그릇을 다 먹자 여기에 왜 오게 되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었죠.


마법사 할머니는 게르다에게 시간이 멈춘 장미를 보여주었습니다.

“와, 할머니! 너무 예뻐요. 근데 이건 무슨 꽃인가요?”

게르다가 말했어요.

“이것은 그냥 나의 꽃이란다. 네가 예쁘다고 해주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내가 금방 원래 있던 옷장 속에 이 꽃을 넣어두고 와야겠구나.”

마법사는 본인이 건 마술을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그렇게 게르다는 카이와 고향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매일 예쁜 꽃과 나무와 시냇물을 보면서 마법사 할머니와 여우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들판에는 매일 예쁜 꽃들이 펴 있었기 때문에 게르다는 행복했습니다. 마법사 할머니가 과수원 일을 마칠 때쯤 게르다는 예쁜 풀꽃을 한 아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날은 여우에게 줄 화관을 만들고, 어느 날은 마법사 할머니와 함께 식탁을 장식할 꽃다발을 만들었어요.


오늘도 게르다는 집 앞마당에서 예쁜 꽃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짙은 분홍의 백일홍과 흰색, 노란색, 보라색의 들국화가 예쁘게 어울렸어요. 게르다는 가위를 가져와 풀꽃을 예쁘게 다듬고 익숙하게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깜박 실수로 손끝이 가위에 찔리게 되었습니다.

"아야!"

게르다의 손가락 위로 빨간 핏방울이 맺혔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게르다의 외침에 놀란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어요.

"괜찮아. 크게 다치진 않았어. 그런데, 우리 풀밭에는 왜 피처럼 빨간 꽃이 없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 이런 색을 가진 꽃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 장미!"

말을 마친 게르다는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어요.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어요.

마법이 풀린 것이었습니다.

"카이... 불쌍한 카이... 내가 너를 잊고 있었어. 카이의 할머니는 잘 지내고 계신 걸까?

어머! 벌써 밖은 가을이야. 어떻게 해."


그때 마법사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왔어요. 마법사는 울고 있는 게르다를 보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어요. 게르다가 가엽고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게르다 야. 벌써 기억이 돌아온 거니? 조금 더 나와 여기에서 행복하게 지내면 안 되겠니?"

마법사의 질문에 게르다가 대답했어요.

"그럴 순 없어요. 그동안 너무 행복했지만, 벌써 가을인걸요. 얼른 카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가족들이 우릴 애타고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할머니, 카이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나는 아주 행복했단다."

할머니는 옷장 깊숙이 숨겨둔 장미가 든 병을 꺼내와 게르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법으로 풀꽃들을 엮어 썰매를 만들었습니다.


"게르다, 이 풀꽃 썰매는 너를 눈의 왕국으로 데려다 줄 거야. 하지만,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단다. 꽃들은 금방 얼어붙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는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단다. 이 여우 녀석은 의심스럽지만 믿을만하니 너에게 도움을 줄 거야. 둘이 함께 꼭 끌어안고 추위를 이겨내도록 하렴."

마법사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게르다는 배낭에서 카이의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빨간색 스웨터를 꺼냈습니다.

"할머니, 이건 카이네 할머니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에요. 저는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으니 이 스웨터를 선물로 드릴게요. 저와 여우가 항상 할머니 곁에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게르다는 빨간색 스웨터를 마법사의 어깨에 두르면서 포옹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과 여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작별을 하였습니다.


마법사의 풀꽃 썰매는 게르다와 여우를 태우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들판을 달려 눈의 왕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어요.








풀꽃 썰매는 빠르게 눈의 왕국에 가까워졌어요.

풀꽃이 가득 핀 들판은 점점 이끼나 짧은 풀들이 가득한 땅으로 변했고, 곧이어 침엽수가 있는 숲으로 들어섰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하더니 풀꽃 썰매의 꽃잎들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얼어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눈 위를 걸어 성까지 가야만 했어요.


날씨가 너무 추워 게르다는 여우를 가슴에 꼭 안고 눈 밭을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여우는 참 따뜻했어요. 처음 만나던 날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게르다의 애정표현을 어색해했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게르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어요.


성에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눈송이들이 날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눈은 점점 더 거세졌어요.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졌고, 먹구름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앉아있었죠.

그러나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어요. 카이가 바로 저 성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눈송이들은 점점 더 커졌고, 그 모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침엽수 뒤 쪽에 숨어서 큰 눈덩이들이 반짝이며 게르다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서 거대한 눈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카이의 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맞았어요. 눈의 왕국을 지키는 눈 괴물들이에요.


괴물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게르다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어요. 언뜻 보기에도 괴물이 열은 되어 보였죠. 여우 모양이나 곰 모양의 눈덩이로 만들어진 눈 괴물들은 바위만큼 단단해 보였고, 파란색 눈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빛을 내며 가까워졌습니다.

게르다는 무서웠지만, 여우를 꼭 안고 숨을 가다듬었습니다.

"어떤 괴물이 나타나더라도 내가 널 지켜줄게."

게르다가 그러게 말을 하자 여우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여우는 게르다의 품속에서 폴짝 뛰어내려 눈밭에 착지했어요.

여우의 옅은 금빛 털은 눈부신 금색으로 빛을 내며 따뜻한 기운을 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작고 통통한 여우는 조금씩 커지더니 그 크기가 송아지만 해졌어요. 여우는 경쾌하고도 깊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여우의 울음소리는 키가 큰 나무들 사이에서 메아리치면서 넓게 퍼져나갔죠.


그러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게르다를 향해 달려오던 괴물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섰고, 푸른색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까맣고 초롱초롱하게 변했죠. 마치 어린 시절 게르다와 카이가 만들던 눈사람의 예쁜 조약돌 같았어요. 그리고는 여우의 울음소리에 화답하려는 듯이 저마다 기분 좋은 가르랑 소리들을 내기 시작했어요.

여우는 게르다에게 등 위에 올라타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게르다가 여우의 등에 오르자 여우는 다시 한번 경쾌한 울음소리를 내며 눈 괴물들에게 인사를 하고 눈의 왕국의 성으로 뛰어갔습니다.







여우는 여왕의 성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홀로 게르다를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높은 천장이 있었고, 홀의 한가운데에는 곱슬거리며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녀가 얼음으로 만든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홀의 사방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큰 창이 있었고, 가운데서 창가로 내려오는 짧은 계단이 홀을 빙 둘러 있었습니다. 그 계단 한 구석에는 낯익은 모습의 소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카이!"

게르다는 반가워 카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여우의 등에서 뛰어내려 카이에게로 달려가 카이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카이는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누구세요?"

갑작스러운 게르다의 등장에 카이는 얼떨떨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자신을 껴안고 있는 이 사람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죠.

"얼굴 좀 봐봐, 카이. 왜 이렇게 몸이 차가워. 그래도 평안해 보여 다행이다."

게르다는 카이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카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카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게르다의 입술은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그렁그렁했어요.

그리고는 카이의 손을 맞잡고 기쁜 마음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카이! 네 눈에 먼가 있어. 이리 와봐 내가 불어줄게."

게르다가 카이의 눈을 '후~'하고 불자, 카이의 눈에서는 또르르 눈물 방울이 떨어졌고, 눈물방울에 섞여 어떤 유리조각이 흘러내렸어요.

그러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카이의 손에 게르다의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볼도 생기 있게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고요.

"아, 게르다구나! 나를 찾아와 줘서 고마워. 이렇게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봐준 사람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카이가 말했습니다.


게르다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홀 중앙에 얼음으로 만든 큰 의자에서 당황한 듯 앉아 있는 긴 금발머리를 가진 소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편안하게 누운 옅은 황금빛의 북극여우도 보였죠.

게르다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아!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지? 너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니?"

게르다가 이렇게 말하고 그녀에게 다가가자 무릎 위의 여우가 빙그레 웃음을 짓는 것 같았습니다.

게르다는 메고 있던 배낭 속에서 마법사 할머니가 시간을 멈추어 둔 장미꽃이 든 병과 봄의 풀밭의 향기를 담 작은 병을 그녀에게 내밀었습니다.


"장미꽃이 필 때 다시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멀리 살아서 오지 못했나 보구나.

이 꽃은 카이에게 주려고 가지고 왔지만, 너에게 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어때? 참 예쁘지?

우리 텃밭의 봄 냄새도 가득 담아 왔어.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

아 참! 그때도 우리 소개를 안 했었구나.

안녕? 나는 게르다야."

한껏 상기된 얼굴을 한 게르다가 수다스럽게 재잘거리자 금발머리 소녀는 웃음이 났습니다.

"안녕! 나는 플로라야. 눈의 왕국의 왕이야."

금발머리 소녀가 말했습니다.


셋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어린 시절 장미의 집 옆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내일은 집으로 조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마법의 문을 만들어 줄게. 처음 이곳으로 들어온 카이네 방 창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플로라가 계속 말을 이어갔어요.


"혹시 내일 돌아가기 전에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부모님의 방에 있던 거울을 깨뜨리고, 거울 조각을 모두 날려버렸거든.

그 조각이 카이의 눈에 들어가 카이가 힘들었던 것 같아.

우리 부모님은 주말이면 그 방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셨지.

아마 두 분은 자신과 서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셨던 것 같아.

나도 더 이상 마음의 소리를 외면만 할 수는 없으니 유리조각을 다시 모아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데 너무 무서우니 같이 있어줄 수 있어?"

플로라는 처음 거울을 마주하던 순간의 공포를 다시 떠올리듯 목소리를 떨며 이야기했어요.


"그럼, 당연하지! 우리가 손을 꼭 잡고 꼭 옆에 있어 줄게."

게르다와 카이가 한 마음이 되어 말했습니다.



다음날 세 사람은 카이가 처음 도착한 그 방에 모였습니다. 아직도 그 방의 커튼은 바람에 날리던 그대로 얼어있었고, 모닥불도 타오르던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죠.

세 사람은 손을 꼭 잡았습니다.

플로라가 크게 숨을 들이쉬자, 얼어 있던 방안은 점점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어요. 커튼도 다시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고, 모닥불도 다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거울의 조각을 모을 차례입니다.

플로라는 마음을 집중하여 거울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열려있던 창문 틈으로 거울 조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조각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작은 조각들이 그 옆에 몰려 붙으면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로 재잘거리던 조각들이 한데 모이니 점점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도움을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물론, 도움을 받는다고 내가 바로 괜찮아지지는 않을 거야. 결국 나의 일은 내가 헤쳐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  

거울의 말에 게르다가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이곳에 있어 당연한 사람인 듯이 편안하게 대해 주었어.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보다는 함께 있어주는 게 훨씬 마음에 위로가 되었어."

카이도 거울에게 따뜻하게 말을 해 주었어요.


곧 플로라가 거울 조각 모으기를 완료했을 때, 거울은 아무 말도 없이 오로라 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너무 잘게 깨어진 조각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표면이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더없이 맑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플로라의 마음도 차분해져 있었죠.

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제 게르다와 카이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플로라는 방의 한쪽 벽에 장미덩굴로 둘러싸인 작은 나무 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이의 방 창문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사실은 내가 여우에게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오지 못하게 마법사 할머니에게 안내하라고 했어.

정말 미안해.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를 만나줘서 고마워.

다음 눈이 오는 날 다시 찾아갈게. 조심히 가."

플로라는 자신의 머리색과 꼭 닮은 털을 가진 여우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아쉬운 듯 게르다와 카이에게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여우는 금빛 꼬리를 흔들면서 두 사람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두 아이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이의 방에 도착했습니다. 방은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가기 전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대신 창문에서 카이의 눈물 자국은 사라져 있었고, 창밖에 첫눈이 소복이 내려 있었습니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두 아이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할머니에게 와락 안겼습니다.

할머니가 있던 거실의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두 아이의 뒷모습은 훌쩍 자라나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동화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의 우울과 공황을 함께해주신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서 정성껏 썼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 아무렇지 않게 옆을 지켜준 회사 선배님들, 항상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의사 선생님들과 상담 선생님들, 그리고 저의 도움 요청에 기꺼이 응해준 가족과 친구들을 보면서 저도 이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플로라는 사실 저의 세례명입니다. 플로라가 깨뜨린 거울의 작은 조각들은 아직도 하늘을 떠돌다 제 눈에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고, 마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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