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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Jun 30. 2020

갑자기 6주 만에 책을 만들었다

글 쓰는 딸과 시 쓰는 아빠 탄생기


두 달 전 남자 친구가 독립출판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독립 출판뿐만 아니라 독립 영화, 인디 음악, 소도시 여행 등 작고 개성 있는 것들을 참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명화, 고전 소설, 할리우드 영화 같은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다.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의 취향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기 위한 시도를 많이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취향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서 주로 남자 친구가 나의 취향을 많이 맞춰주었었다. 올해 들어 나는 19세기 미국에 꽂혀있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는 나와 함께 영화 '작은 아씨들''커런트 워'를 보았고, 나에게 모지스 할머니에 관한 책을 선물로 주었다.

이제는 나도 남자 친구의 취향을 좀 나눠보자고 생각할 무렵에 남자 친구가 독립 출판 수업을 간다고 했다. 나도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 함께 하기로 했다. 한 번도 글을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아빠가 언젠가는 시집을 내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아빠 시집이나 만들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수업을 신청했다.







5월 16일 토요일, 수원에 있는 '천천히 스미는'이라는 작은 책방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책 방장님이신 이지예 대표님과 우리의 선생님인 박지현 작가님과 나와 남자 친구, 그리고 새내기 작가 민달님이 함께 했다. 선생님은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정말 정확한 발음으로 빠르게 말씀해 주셔서 귀에 내용이 잘 들어왔다.


첫 수업에서 각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본인이 만들고 싶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빠가 시집을 내고 싶어 하셔서 몇 년째 시를 계속 쓰신다는 이야기와 생일 선물로 책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른 예비 작가님들은 서로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글로 담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 재미있는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부러움이 생겨났다. 수업을 마치고 남자 친구는 이번 기회에 나도 자신의 이야기를 좀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이야기했다. 그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만 그날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다른 분들을 보면서 나도 나만의 글을 써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부러움이 마음속에 틈을 만들어 놓기도 했고, 5월 15일에 스핀오프 퇴사를 하고 16일에 첫 수업을 가는 것이어서 묘하게 시간이 비어 있기도 했다. 도전 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조건이었다.



첫 번째 주에는 아빠의 시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 20편 정도를 선택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나의 이야기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20편을 적고 싶었지만 우선 쉽게 적을 수 있을 법한 13가지 주제를 정했다.



1주차: 주제와 아빠의 시 선택하기


그 후 3주 동안은 거의 하루에 한편씩 글을 썼다. 처음 쓴 글은 '처음으로 퇴사를 하고, 창업을 준비합니다.'였는데, 이 글은 이틀 동안 공을 들여 A4용지 한 장을 겨우 채워 쓴 글이다. 글 쓰는 작업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다행히도 퇴사 후 사람들과 며칠 정도 쉬기로 하여 시간이 있었다. 이렇게 매일 쓰다 보니, '세상에 상대적인 행복은 없습니다.'라는 마지막 글을 쓸 때는 2-3시간 정도만에 초안을 완성했던 것 같다. 물론 수정 작업과 중간에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처음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3주 차에 글을 4-5편 정도 완성하고 난 다음에 브런치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대생으로 살면서 인문학과 멀어져 있었지만 창업을 하게 되면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브런치에 완성된 글들을 올리고 작가 신청을 하였다. 며칠 후 작가 선정 메일이 왔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열심히 쓴 노력이 가상해서 작가로 받아주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겠다는 계획을 열심히 적어두었더니, 노력을 더 가상하게 여겨주었을지 모른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D)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글을 쓰는 것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혼하고, 진급 누락하고,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 쌓여 있던 마음속의 먼지들을 싹 끄집어내는 느낌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괜찮은 척하느라 꼭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연 느낌이었다. 이렇게 못난 경험을 했지만, 나는 점점 괜찮아지고 나로서 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보너스로 글을 쓰는 동안 많이 울었더니 맘 속 구석에 있는지도 몰랐던 먼지들도 많이 씻겨 내려갔다. 오빠는 내 글을 읽고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아이인 줄 몰랐다. 멋지게 살고 있어서 좋다.'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가족들에게 안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4주 차 5주 차에는 인디자인 작업을 했다. 처음 배운 프로그램에다가 디자인적 감각까지 없다 보니 내 맘처럼 책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막 회사가 법인 설립을 하고 사무실에 입주하던 시기여서 짬을 내기가 힘들었다. 인쇄소에 맡기기 하루 전 팀원들에게 첫  연차를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새벽까지 인디자인 작업을 마치고 인쇄소에 파일을 넘겼다.

 



샘플 책을 받던날 수료증도 함께 받았는데 20년만에 받아보는 상장이라 기분이 좋았다.




6주 차에는 다 함께 모여서 서로의 책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민달님은 직접 만든 수제 모히또를 가지고 오셨는데, 선생님이 가져오신 과일치즈와 찰떡궁합이었다. 거기에 책방 대표님의 입고 이야기를 들으니 달콤함이 배가 되었다.

급하게 표지를 만들었던 나는 표지 생김새가 아쉬워서 그동안 즐겨보던 브런치 작가님께 표지 이미지를 의뢰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처음 본 샘플 책은 손 볼 곳이 참 많았다.

샘플 책 한 권은 다음 주에 있을 아빠 생신에 선물로 가져가야겠다. 아빠가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다른 한 권은 수정을 열심히 해서 출간을 해볼까 한다.

6주 동안 참 즐겁게 살았다.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수업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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