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가 약해지셨다.
몇 달 전 본가를 갔을 때도, 부모님은 "우리가 아직은 건강하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에 괜히 짜증이 났다. 요즘은 100세 시대여서 20-30년은 걱정 없으실 거라고 말하고, 나중에 내가 아기 낳으면 아기도 봐주고 해 줘야지 무슨 소리냐고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불안은 감출 수 없는 것은 정말 부모님께서 많이 늙으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구부정해진 아빠의 등을 보았고,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간다며 관절을 만지는 엄마의 주름진 손을 보았다. 그리고 결국 지난달에는 엄마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자기 사업한다고,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챙긴다고, 부모님이 점점 늙고 약해져 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내가 미웠다. 얌전히 회사를 다니면서 매년 건강검진이라도 해드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릴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야야, 니는 울 것도 많다. 사람 살다 보면 병도 걸리고 그러는 거지. 니는 머 너희 엄마 아빠는 평생 살 거 같더나? 울지 마라."
엄마의 말로 눈물을 그치긴 했지만,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일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갈까라는 생각을 생각 조금 했었다. 점점 더 약해지는 부모님을 보면서 예전에 큰고모가 떠나던 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 배웅을 하기 위해 KTX에 올라타면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었는지를 떠올렸다. 어떤 도리. 내가 했어야만 하는 어떤 도리를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얼마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네 아빠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거는 니도 알잖아. 자기 삶은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다."라고 운을 떼셨다. 엄마는 아빠의 상태가 걱정이 되지만, 이대로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하셨다. 생로병사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 역시 스스로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매일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고, 여전히 잘 먹고 많이 움직이며 살아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것은 걱정의 눈물이 아닌 감동의 눈물이었지만, 혹시라도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참았다.
최근에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아버지의 두 번째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첫 번째 시집을 내고, 그동안 조금씩 써오던 시들로 올해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싶어 하셨다. 올해 초에는 두 번째 시집 출판 기념 겸 칠순 잔치를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코로나와 다른 여러 행사들로 무산이 되었다. 나는 그때 아쉽게 미뤄두었던 출판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아빠가 기대하던 행사를 진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고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원하시던 두 번째 시집을 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조금 의외의 답변을 하셨다. '내가 해보겠다.'라는 것이었다. 기억이 조금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같이 시를 쓰는 사람들도 있고 첫 번째 시집을 낼 때 도움을 주셨던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보면 무엇인가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엄마도 아빠 혼자 하실 수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고 나의 일이나 잘하라고 말씀하셨다.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이 상당히 멋있었다.
나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온전히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명히 괴롭겠지만, 나 역시 곧 받아들일 일임이 분명하다. 다른 존재의 생로병사를 책임을 져야만 하거나, 자신의 생로병사를 기대어야만 하는 존재는 없다. 서로의 존재를 애틋하게 여기어 보살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그 과정을 온전히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부모님은 육체가 조금씩 굽어가고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지만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서 멋지게 살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다.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깊이 사유하고 여유 있으며 언젠가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지만 그런 과정을 꼭꼭 씹어내지 못하고, 소화 불량에 걸린 채로 꾸역꾸역 지나가는 내가 있다. 많은 욕망과 내가 지키지 못한 도리들을 생각하면서 늘 죄책감에 짓눌린 자아가 있다.
이렇게 꾸깃꾸깃한 자아로는 온전히 나를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이번 주말은 푹 쉬면서 마음의 깊숙한 곳에 온기를 조금 불어넣어 주었다. 따뜻한 기운을 조금씩 충전하여 움츠린 자아가 조금은 부풀어 오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부모님께서 나에게 세상을 보여주면서 원한 가장 첫 번째 도리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