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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Oct 06. 2020

여군에서 왜 기자를 하고 있냐고요?

사실, 내막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진로를 처음 결정하는 고등학생 시절, 나는 공군사관학교를 가서 군인이 되겠다고 선택했다.

무려 17년 전쯤인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나는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게 되는 기회와 계속 마주쳤다.

생도 2학년 때에는 처음 학교에 와서 훈련을 받는 예비생도들을 대상으로 취침 방송을 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야"하며 밤마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고,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라고 못하겠어요?" 하며 내면에 힘을 심어줄 수 있는 긍정적인 글귀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보통은 마이크 앞에 서면 "떨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마이크 앞에서 "떨리는" 기분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그냥 여긴 내 자리다' 하는 편안함이랄까. 그래서인지 나가서 말하는 자리, 방송하는 자리에는 내가 늘 가게 됐고, 그런 경험들이 자꾸 쌓이게 됐다.


생도 시절에 학교에서는 전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패러글라이딩 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행사 진행 경험을 쌓았던 것 같다. 스크립트를 확인하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반영해야 할 멘트들을 해주고, 상황을 정리하고. 현장에서 마이크를 통해 대회 진행상황을 통제하고 이끌어나가는 일은 그야말로 내 적성에 딱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지만, 비행 훈련에서도 내 목소리는 화제가 됐다.

조종사마다 부르는 콜 넘버가 있는데, 당시 내 콜 넘버는 57이었다.

활주로를 스쳐 다시 비행 궤도로 올라가려면 " five seven, base touch and go"라고 콜을 해야 하는데, 비행대대에서는 선배들이 내 콜을 듣고 "얜 도대체 누구냐?"라고 했다고 한다.


어쩌면 난 그때부터 라디오 프리젠터가 될 운명이었던 걸까?


이후 조종사 생활을 박차고 나온 나는 군군 방송에서 현역 앵커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여기에 지원했다. 당시 공군 남자 장교 1명, 육군 남자 장교 1명, 여자 장교 1명, 해병대 몇 명, 이런 식으로 모집 공고가 났는데, 국방뉴스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지원을 희망하는 여군 장교인데 왜 군별로 성비를 제한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뉴스팀장이라는 분은 남/녀 구분을 없애 다시 모집 공고를 내렸고, 나는 공군 장교 1명 모집에서 선발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방송 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저녁마다 진행되는 뉴스 생방송, 또 주말용 녹화방송을 진행했고, 각군 부대로 가서 취재하는 취재 기자로도 활동했다. 신년 비행 취재를 위해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부는 활주로 앞에서 스탠드 업(기자가 서서 현장 전하는 멘트 하는 것)을 하기도 했다.


2년 2개월 동안의 국군방송 생활 동안 각종 야외 행사 사회와 내레이션 요청이 왔다. 당시 연예병사였던 이준기 씨와 한강에서 전우마라톤 대회 사회를 보기도 했고, 국군 교향악단 음악회 사회, 공군 참모총장 이취임식 사회, 공군 작전 재연 행사 사회 등 다양한 사회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은 내가 국군방송을 하면서 눈 뜨게 된 영역인데, 다소 딱딱한 톤으로 감정을 배제한 채 뉴스를 전하는 것과 달리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톤을 조절할 수 있고 때에 따라 감정을 넣을 수도 있는 내레이션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 성우 학원을 등록해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등포에 위치한 드림액트 성우 학원이라는 곳에서 목소리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호흡과 발성, 공명, 그리고 캐릭터 분석과 다양한 영역대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군인 신분이었지만  KBS 성우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고, 전역 후에도 성우 시험에 두 차례 더 응시했었으니, 성우에 대한 나의 애정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근무 기간을 채우고 다시 공군의 보급 수송 장교로 복귀한 나는 전역을 결심하고 1년 남은 장교 생활을 보냈다. 사실 보급 수송 장교였지만 보급 수송에 대해 잘 몰랐다. 내 특기와 맞지 않는 방송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 내가 국군방송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특기(보급 수송)와 관련 없는 분야로 가는 것이 너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픈 건 꼭 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나중이나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5년 간의 장교생활을 끝으로 전역을 했고, 2013년 3월, 자유의 몸이 됐다.

군 생활에서 경험한 마이너리티로서의 삶, 여성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이후 나는  NGO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이 곳에서도 내 "목소리"는 인기였다.

전체 직원이 800여 명 가까이 되는 큰  NGO 였기에 매년 1회 전체 직원 연수를 크게 한다. 3박 4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되는 이 직원 연수에 사회를 볼 직원을 정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본부 측에서 나를 불렀다. 내 경력 등을 고려해 테스트를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홍보팀에는 아나운서 시험을 봤는지 준비를 했는지 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그 분과 내가 경합(?)을 벌이게 된 것이다.

스크립트를 주길래 그냥 읽었다. 그런데 입사한 지 두 달 도 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전체 행사 사회자 자리를 맡겨 주셨다.


익숙하게 스크립트를 점검하고 리딩을 하고, 예상 가능한 애드리브를 미리 적어보고. 그렇게 다시 나는 마이크 앞에 섰다. 전 직원에게 내 이름을 (의도치 않게?) 알리게 됐고, 이후 단체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관련 행사 사회, 영상 촬영에 함께 하게 됐다.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개그맨 유민상 씨와 함께 희망 트리 행사 사회를 진행한 것이었는데, 왜 기억이 나느냐 하면, 유민상 씨가 실제로 보니 정말 체구가 큰 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마이크는 내 분신처럼 따라다녔다.


 NGO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남편을 만났고, 남편의 뜻에 따라 퇴사 후 아일랜드 더블린이라는 곳에 어학연수를 떠나게 됐다.  이후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됐고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나는 점점 내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경. 단. 녀."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다. 방황도 많이 했고 밤마다 깊은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은 내게 그러지 말고 배우고 싶은 걸 다시 배워보라고 조언했다.

 

마이크 앞으로 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 오래 쉬었으니 다시 한번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 보라는 것이었다.  (역시 공군 수송병 출신다운 아름다운 조언이었다.)

남편은 내가 아나운서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원비가 생각보다 너무 비싸서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 나에게 "지금 꼭 배워야 한다"라고 용기를 주었다.


남편이 주는 용기를 먹어가며, 나는 그렇게 매주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호흡, 발성, 정확한 전달. 익숙하면서도 새로웠고, 그곳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과 함께 배울 수 있어서 나까지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방송계는 문턱이 참 높았다. 당시 내 나이가 33. 열심히 살도 빼고 예쁘게 프로필 사진도 찍었지만, 지원하는 곳마다 낙방이었다.


"그래. 난 나이가 너무 많지. 애기 엄마를 누가 뽑아주겠어. 얼굴이 나오지 않는 라디오라면 정말 자신 있는데. "


경제적으로도 빠듯한데 제대로 취업이 되지 않으니 더 조바심이 났다.

언론 관련 채용 정보를 매일같이 들여다보던 나는 키즈 스피치 강사를 구한다는 한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게 됐다. 결국 여기서 짧게 아이들을 가르치긴 했지만, 너무 멀고 여건이 맞지 않아 오래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와중 우리 가정은 다시 남편의 학업으로 인해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게 됐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 영국 땅에서 도대체 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 방송을 하려면? 어디가 있을까?

영국에서  NGO  쪽으로 취업을 한다면?


가능한 리스트들을 뽑고 채용 공고를 팔로우 업 했다.

내가 런던 땅에 도착한 건 2019년 8월 28일. 정확히 2주 후  BBC  코리아 런던 팀에서 프리랜서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여보!!! BBC 코리아에서 사람을 뽑는다는데????"

"여보. 난 여보가 무조건 될 거라고 확신해."


남편은 또다시 나를 강하게 지지해줬다. 오디오를 녹음하고 지원 파일을 제출했다.


"제발!"


하지만 한 달 정도가 다 되어가도  BBC  측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됐구나 하는 좌절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역시 내 추측에 불과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발품을 팔아보기로 했다. 매일 라디오 뉴스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000입니다~ 하는 그 이름에 의지해 링크드 인으로 그분을 찾았다. 메시지를 보내 프리랜서 채용 지원했는데 혹시 아는 정보가 있는지 여쭤보았다. 그분도 나와 같은 공고를 통해 선발된 분이었다는 걸 알게 됐고,  BBC 코리아 편집장 분을 링크드인을 통해 찾게 됐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부 사정이 있어 채용 절차가 조금 늦어진다고, 연락드리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가 될 뻔했구나. 역시 두드리고 구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게 또 한 주, 두 주 가량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면접을 보게 됐고,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제 거의 이곳에서 일을 한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국제 기사를 쓰고,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는 일. 그리고 영어 방송을 번역해 오디오를 녹음하고 편집하는 일 등이다.


돌고 돌고 돌았지만, 결국 나는 또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아니 앉아 있다.)

비록 코로나로 힘들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앞으로 내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나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내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게 가장 나 다운 것이며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임을, 지난 세월들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것 저것    필요도 없고, 내가 제일  하는 ,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나 알면 되는  같다.  그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며 내 목소리를 쓰는 일이라는  30 중반이 넘어서야 알게 됐으니, 김연아 선수 같이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한 사람들에 비하면  늦게 깨달았다. 근데  생각해보면 마흔이 되기 전에알았으니  또한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 저것 말고 딱 하나만,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거 딱 하나만 찾기. 그리고 그 분야를 깊게 파기. 파고 파고 파다 보면 내가 갈 길이 보이고 내가 입어야 할 옷이 보일테니. 나도 이제 방황은 그만 하고 그냥 냅다 파야겠다.


Let’s dig dig d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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