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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Oct 23. 2020

"애 낳고 와서 감 떨어지셨나 보다"

애 낳은 한 여자가 내게 말했다


다니던 직장을 퇴사한 상태에서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2년을 열심히 키웠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 물, 꼬꼬, 양이.. 말할 수 있는 단어도 조금씩 늘어났다. 엄마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내게 아이는 참 소중한 존재였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숭고한 경험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걷고 뛰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라는 이름의 방은 점점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난 이제 뭘 하며 살아야 하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난 뭘 잘할 수 있지?'


30대의 아이 엄마가 된 나는 마치 19살 고등학생이 진로를 고민하는 것처럼 다시 내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30살이 넘어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20대부터 계속됐던 내 방황. 그리고 그 방황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남편은 내게 있어 가장 큰 조력자이자 지지자다. 언제나 나를 격려해주고 믿어주는 남편이 있어 휘청일 때마다 중심을 잡는다.


"그러지 말고, 좋아하는 거 다시 배워봐."


남편은 내게 방송 쪽 일을 계속해보라고 권유했다. 20대 때 군인으로 있으면서 국군 방송에서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고 기사를 썼던 경험을 살려 그쪽으로 계속 경력을 쌓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2년 넘도록 사회와 멀어져 있던 나의 자신감은 저 밑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해봐야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일단 한 번 배워봐."


그렇게 해서 나는 2018년 겨울, 서울의 한 아나운서 학원을 등록했다. 비싼 등록비에 끝까지 등록을 망설였지만, 남편은 꼭 배워야 한다고, 더 늦지 말자고 조언했다.


주말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학원에 갔다. 3명의 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연습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하면서 그 친구들과 많이 친해졌다. 매주 나보다 3~4살씩 어린 동생들을 만나 수업을 하니 나까지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규 수업과정이 끝나고 우리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다 함께 스튜디오로 가서 프로필 사진도 찍었다.


기자나 진행자를 뽑는 자리가 생길 때마다 지원했지만, 매번 1차 서류도 통과하지 못했다. 열 군데도 넘게 낙방이 이어지자 잠깐 살아났던 나의 자신감은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난 안되나 봐. 애 엄마를 누가 뽑아주겠어."

"아니야. 여보. 여보만의 자리가 반드시 있을 거야."


불안함으로 떨던 그 겨울, 나는 한 채용 사이트에서 어린이 스피치 강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집과 많이 멀었지만, 그래도 일단 지원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에, 한 껏 들떠 면접장소로 향했다.


4~5개의 작은 교실이 마련된 아담한 크기의 학원이었다.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을 잘 이야기한 후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뒤,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원했던 건 풀타임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시작해보자 하는 마음에 수락했다. 강의안에 따라 아이들을 지도하는 방법을 배운 뒤, 마침내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내가 맡은 반은 초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반이었다. 또랑또랑하게 자기 생각을 잘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고학년인데도 문장을 잘 구사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아이들에게 자신감 있는 말하기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수업했다.


수업 연습하던 모습


하지만 첫 급여를 받고 두 번째 급여를 받게 됐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 원장은 나중에 내가 수업을 더 늘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아이들이 많이 수업을 하게 되면 인센티브가 더 있을 것이고 등등의 혜택을 이야기했지만, 내가 받는 급여를 시간으로 나눠 보면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다. 같은 학원의 다른 선생님께 조심스레 급여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보다 자신이 돈을 더 못 벌고 있다고 말하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채용 공고 사이트에는 여전히 내가 일하는 지점에서 선생님을 뽑는다는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수업을 끝내고 쉬고 있는데 다른 분이 면접을 보는 것도 목격했다. 자꾸 사람이 떠난다는 뜻이었다. 선생님들이 오래 있을 수 없는 이유, 급여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었다.


애초에 3달을 수습기간으로 정하고, 내가 이 직종에 맞는지, 또 학원 입장에서는 내가 선생님으로 괜찮은지를 평가한다고 했다. 3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원장에게 나와 맞지 않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대뜸 그 원장은 내게 화를 냈고, 비꼬 우는 말투로 말했다.

"아, 애 낳고 와서 감 떨어지셨나 보다."라고.


이 말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히지도 않는다.

그 학원 원장 역시 출산한 지 8개월 정도 된 한 아이의 엄마였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원장과 부원장은 나에게 근처 카페로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학원 바로 옆에 위치한 한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최저시급도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계속 일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급여에 대한 설명과 달랐다. 언제까지 주 이틀씩 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3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이 학원의 선생님으로서 계속 근무할지를 고려하고 결정하는 것은 근로자로서의 내 권한이었다. 이런 부분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원장이라는 여자는 굉장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피식) 결국 돈 때문이네?"


비웃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러더니,


"어린이집 제출한다고 학원에서 재직증명서 떼 가더니, 우릴 이용한 거예요?"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이성의 끈을 놓았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집에 제출해야 하는 재직 증명서를 요청했었다. 자녀를 둔 부모가 일을 하기 위해 취해야 하는 법적인 절차였다. 근데 그 걸 이용했다고 말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스피치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말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들이 그러도고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나요? 당신들이 스피치 강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요?"


이성을 잃은 나는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목소리 낮추세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니까, 당연히 필요한 서류니까 요청드린 거잖아요. 어떻게 그걸 이용했다고 말해요?"

"목소리 낮추세요."


그 학원 원장은, 내가 자꾸 '스피치 강사 스피치 강사' 말하니 불안했는지 자꾸 목소리를 낮추라는 말만 했다.

인수인계를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3개월 안에 나와 맞지 않다고 판단해서 그만두겠다고 말한 내가 이런 치욕스러운 말까지 들어야 하나 싶어 눈물이 났다. 참던 눈물은 끝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서럽고 너무 황당했다. 그것도 같은 엄마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결국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내가 해야 할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고 그곳을 나왔다.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 출근한 며칠 동안, 원장과 부원장은 내게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같이 급여에 대해 고민했던 다른 선생님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나보다 3~4일  전에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원장 입장에선 3명밖에 없는 선생님 중 2명이 거의 동시에 그만둔다고 말한 셈이다. 학원에서 처음 일을 배울 때에도 전에 본인이 출산하려고 병원에 있는데 어떤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사람이 자꾸 그만두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보면,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분명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그만두는 것 아닐까. 왜 같은 조직에 사람들이 계속 나갈까. 내가 만약 원장의 입장이라면 그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 같다. 비싼 수업료 * 학생수 하면 월 수익이 뻔히 보이는데, 원장과 부원장을 제외한 선생님들에게는 최저시급도 안 되는 급여를 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아무튼 경력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나의 첫출발은 이렇게 쓰디쓴 경험으로 끝이 났다. 그 학원을 그만둔 뒤로도 꿈에 그 원장이 나오기도 할 정도로 많이 괴로웠다. 내가 사회에서 이런 대접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서글펐고, 왜 이렇게 지질하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에 대한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학원에 지원하고 강사 활동을 했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픈 경험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더 강하게 해 준 경험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그런 대접받지 않기 위해, 더 똑똑해지고 더 강해져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엄마도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이 키우면서도 전문 영역을 계속 쌓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여성이 되기 위해, 그런 본보기가 되기 위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이 나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이 곧 내 미래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더 찾고 있다. 나의 잠재력을 더 찾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 잠재력을 구현해낼 방법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엄마들이 더 연결되기를 소망한다. 엄마들이 더 당당해지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사회로부터 "애 낳고 와서 감 떨어졌냐"는 말을 들으며 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더 배우고, 탐구하고, 읽고, 쓰고, 그런 그런 엄마가, 그런 여자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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