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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Jan 11. 2021

스피킹 시험같던 영국택시 타기

아침 7:50분부터 30분간 이어진 영어 대화

일요일 아침, 오늘은 나의 주말 근무가 있는 날이다.

영국이 봉쇄 조치를  Tier 4까지 격상하면서 필수 목적을 제외한 모든 외출은 금지된 상태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Teir 4단계로 격상이 되면 택시를 지원해주고 있다.

아침 7:50분으로 택시를 예약해두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정확한 시간에 택시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울렸고, 나는 마스크를 쓴 채 서둘러 집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멀리서 벤츠 택시가 기다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간혹 벤츠 차가 택시를 운영하는 걸 볼 수 있다.)


문을 열자,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털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악센트나 외모로 보아 영국인이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보통 택시를 타면 먼저 말을 시작하는 법이 거의 없는데, 대체로 내가 말을 안 하면 (특히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운전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늘은 이 할아버지가 시작부터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내 목적지가  BBC 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택시 기사님은 대뜸

"넌 거기서 라디오 파트야 티브이 파트야?"하고 물어 온다.


"응 나는 라디오 파트고, 코리아팀이라서 북한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어."


앗차차...

북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운전자 석 상단에 붙어있는 거울을 통해 할아버지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북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북한 인구는 몇 명인지, 북한에서 뉴스를 듣는 게 가능한 일인지, 너는 통일이 되기를 원하는지,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의한 통일이 이뤄지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는 운전하는 30분 동안 쉬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차량 뒷자리에 탑승한 나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상체를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역시 마스크를 쓰고 빠른 속도의 영국식 영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한국은 50만 명이고, 북한은 25만 명 정도 돼."

"남한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구나."

"그렇지"


할아버지는 리엑션도 잘해준다. 대충 못 알아듣는 척하고 조용히 가면 좋겠지만 호기심 가득한 할아버지는 또다시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고, 나는 하나하나 아는 선에서 답변을 했다.


"응. 북한에서 국제 뉴스를 듣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 시간 밤 12시에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어. 몰래 집에서 듣도록 말이야."

"나는 언젠가 통일이 되기를 원하긴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은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평균 1년에 1천 명 ~2천 명 정도의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해서 남한으로 넘어와.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걸 접하고 자유를 찾아오는 거야."



이제 북한 이야기에서 탈출했다 싶어 안도하는 순간, 할아버지는 나의 영국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너는 영국에 처음 와서 어떤 인상을 받았어?"

"나는 영국에 2019년 9월에 왔는데, 영국에 공원이 많아서 참 좋다고 생각했어."

"날씨가 아니고?"

(유머까지 골고루 갖춘 위트있는 할아버지다.)


"하하하. 날씨.. 글쎄. 사실 나는 결혼하자마자 더블린에서 1년 정도 살았어. 더블린은 거의 매일 비바람 불고... 정말 잔인했지. 거기에 비하면 런던 날씨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


할아버지의 눈가엔 잔잔한 주름이 져 있어지만, 그의 눈망울은 내 4살 난 아이의 것처럼 초롱초롱했다.


"아, 너 가정이 있어 여기에?"

"응 나는 아들이랑 남편이랑 여기 같이 살고 있어."

"너 아이도 있어? 몇 살이야?"

"응 내 아들은 4살이야."

"그럼 네가 일해야 해서 같이 가족이 온 거야?"

"사실 남편이 공부를 해야 해서 우리 가족이 다 여기로 왔지. 난 여기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거고."

"네가 남편을 서포트하고 있는 거구나."

"그렇지. 우리 남편도 막 졸업해서 요즘에 취업하려고 지원서 쓰느라 바빠."

"그래. 예전엔 아내가 남편을 서포트한다는  흔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달라졌어."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혼자 출근하는 게 너에게 약간 쉼을 주기도 하겠다?"

"ㅎㅎㅎ 어떻게 알았어? 사실 주말 출근이 싫긴 해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는 점에서

좋기도 해."


리엑션 부자 할아버지는 내가 답하는 말에 적극적으로 응해주면서 본인이 궁금한 점들을 유연하게 질문해 나가는 놀라운 스피치 기술을 선보였다. (아마 이 할아버지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드디어 회사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이 3배속으로 흘러간 것 같았다.

회사 앞 스타벅스가 보였다.


"나 여기 내려줄래?"

"너 커피 원하는구나."

"ㅎㅎㅎㅎㅎ (모든 걸 아는 할아버지) 응 나 아침에 카페인이 필요해"

"고마워, 안전 잘 지키고 잘 가! 좋은 하루 보내!"

"너도 좋은 하루 보내! 안녕~!"


이렇게 할아버지와의 (브리티시) 영어 리스닝&스피킹 시험 같던 택시 타기는 끝이 났다.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아침부터 어쩜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시는지...

초롱초롱한 그의 회색 눈망울이 눈에 선했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나에게 집에서도 남편이랑 영어로 대화하라는 조언을 남겼으니, 나는 영어 공부에 좀 더 열심을 내봐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확실히 받게 됐다. 진짜 할아버지 말대로, 오늘부터 영어 공부 좀 제대로 해 봐야겠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image 출처: c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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