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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Oct 15. 2019

방어적 혁명가,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의사소통행위이론 2

 철학이라는 학문이 현재에도 존재의의를 가진다면, 그것은 철학이 현재에 대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기능주의적으로 또는 실용주의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무쓸모의 쓸모로서라도 지금-여기(now-here)의 인간에게 필요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철학은 단지 사변적 두뇌훈련이상의 의미 이상을 갖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현재-여기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물론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의 목록 중에 지금-여기의 기원에 대한 탐구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탐구의 많은 부분은 역사학과 사회학에서 담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여전히 지금-여기의 기원에 대해 역사학과 사회학을 통시적으로 관통하여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직조하기 위해서 여전히 필요하다. 이것은 철학이 반드시 일종의 보편사의 개념 또는 역사의 진보라는 근대의 낙관적 전망을 기본적 관점으로 채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은 지금-여기의 기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심지어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도-불가피하게 보편성을 띠는 설명을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 역시 이런 관점에서 지금-여기의 기원에 대한 보편적 탐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철학적 직조를 위해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두 개의 바늘을 꺼내들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회적 진화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이차적 분화과정이다. 즉, “체계와 생활세계는, 전자의 복잡성과 후자의 합리성이 증가하면서 각각 체계와 생활세계로서 분화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서로로부터도 분리된다.” 하버마스에게 사회는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두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 간략하게 정의하면, 생활세계는 대화참여자들 간의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되는 사회의 상징적 구조물이며, 체계는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과 발전을 위해 구성되는 제도적 복합체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면 체계와 생활세계는 처음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발달해온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 공동체시기에는 생활세계 속에 체계가 분리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 내부의 상호작용 또는 공동체 외부와의 상호작용의 증가는 차츰 생활세계의 합리성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렇게 생활세계의 합리성이 증가하면서 체계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나아가 더 복잡하고 고차적인 체계로 발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체계의 분리 및 체계의 복잡성 증가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리되고 복잡해지기 시작한 체계가 생활세계의 합리성이 수용 가능한 지점을 넘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고삐 풀린 체계명령은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생활세계의 수용능력을 폭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버마스가 설명하는 지금-여기에 대한 역사철학적 도식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아주 간략한 도식에 불과하며,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버마스는 사회학에서 형성된 관례에 따라 인류의 공동체가 밟아온 역사에서 “부족사회, 전통사회 혹은 국가로 조직된 사회, 그리고 (분화된 경제체계를 가진) 근대사회 사이에 사회진화적 단계를 구별”한다. 그리고 이 각각의 단계들은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분화가 없거나 아주 미약한 단계에서부터 생활세계에서 분리된 체계가 제2의 자연처럼 응고된 단계까지의 발달 순서와 일치한다.


 부족사회에서 체계는 생활세계와 구분되어 생각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부족사회에는 오직 생활세계만이 존재했고, 체계는 체계라는 이름을 가지지도 못한 채 생활세계에 기생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가능한 모든 상호작용은 공통으로 체험된 사회세계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 그래서 모든 상호작용 참여자는 집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해석들을 같은 내용으로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불러낼 수 있다.” 이런 부족사회에서 개별적 인간들의 모든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 전체로서의 부족사회를 재생산하는 행위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사회는 모든 개별 상호작용 안에서 전체로서 재생산된다.”


 부족사회가 이처럼 그 자체로 생활세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요인 덕분이다. 하나는 가족적 사회구조, 즉 친족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 의식구조와 세계상이다. 친족체계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혈연관계에 따라 질서를 이루는 가족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는 공동체의 경계를 설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때 공동체의 경계는 확정적인 것이 아닌데, 이는 결혼이 족외혼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부족사회의 “정통적 혈통계보와 족외혼의 강제는 분명한 경계설정이 이루어지게 하면서 동시에 이 경계가 유연성과 투과성을 갖도록 한다.” 다른 한편, 신화적 세계상은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 사이의 범주적 구별”을 지워버린다. 즉 부족사회의 신화적 세계상 속에서 객관적 우주에서부터 개인적 내밀한 심성까지 모든 것은 신화라는 동일한 해석체계의 수준으로 융화되어버린다. 이러한 부족사회를 수평적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부족끼리의 혼인을 통한 교환관계가 산출되고, 부족사회 또는 생활세계의 물질적 재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분업적 협동 그리고 이를 조정하는 조직권력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조직권력과 교환관계는 보다 더 정교하게 제도화되기를 원하고, 이는 부족사회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구조를 불러오게 된다. 바로 환절적 분화와 계층화이다. 환절적 분화란 결혼과 그로 인한 교환관계의 수립을 통해 진행되는데, “주어진 사회집단 안에서 하위집단들이 형성되거나 혹은 유사한 사회적 단위들이 동일한 구조의 좀 더 큰 단위로 결합함으로써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때의 교환관계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제적 거래는 여전히 혼인관계와 그에 관한 생활세계의 규범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계층화란 사회의 물질적 생존을 위해 사회적 협동의 기능적 전문화가 진척되면서 “지시권한을 가진 사람의 결정이 다른 상호작용 참여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결정의 전제로 수용”되게 하는 체계이다. 물론 부족사회에서 계층화를 유지시키는 가장 큰 힘은 고귀하고 오래된 혈통 또는 일반화된 신망이다. 요컨대 좀 더 발달한 위계화된 부족사회에서 체계의 메커니즘이 맹아적 형태로 드러났지만 여전히 생활세계의 규범적 맥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격적인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는 전통사회 또는 국가로 조직된 사회에서 시작된다. 이는 “국가적 조직화의 메커니즘”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국가적 조직화의 메커니즘은 “더 이상 지도적 혈통집단의 명망 때문이 아니라 법적 제재수단을 행사할 수 있기에 권위를 갖는 정치적 강제력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전통사회에서 조직화된 국가적 질서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아닌 정치적 권력 메커니즘과 그로부터 수립된 법에 의한 공직권위에 의해서 구성된다. 다시 말해, 국가사회의 중심 행위자는 더 이상 의사소통 참여자가 아닌 공직권위에 기반한 계층화된 조직인 것이다. 또한 전통사회에서 드디어 “화폐매체를 통해서 조절되는 재화시장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매체가 사회체계 전체에 대해 구조형성적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은 경제가 국가적 질서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이다.” 즉, 정치적으로 계층화된 계급사회에서 경제는 단지 정치의 하위 요소로서 작용할 뿐이며, 자율적인 동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조세체계나 상업에 대해 국가적 통제가 매우 강력하던 절대왕정시대가 바로 이런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아직 종속적 위치에 머무르고 있던 경제는, 그러나 임금노동과 조세국가가 제도화되면서 비로소 자율성을 획득해 나가기 시작한다. 임금노동과 조세국가는 화폐가 단지 상업이라는 특정 부문에 한정되는 것을 넘어, 산업, 노동, 정치, 사회, 문화 등을 가로질러 이 모든 것을 매개하는 매체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계 간 교환매체가 될 때 비로소 화폐는 구조형성적 효과를 낳는다. … 국가기구는 매체에 의해 조절되는 하부체계인 경제에 의존적이 된다. 이것은 국가기구를 재조직하도록 압박하는데, 특히 정치적 권력이 조절매체의 구조와 같아지고, 권력이 화폐에 동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 이런 환경 속에서 자본주의적 기업과 근대적 행정기관들이 생활세계로부터 탈규범화되고 오로지 체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자립화된 단위로 등장하게 된다.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


 생활세계가 합리화되고, 또 체계가 분리되어 복잡성이 갈수록 증가하면서 의사소통의 부담은 갈수록 가중된다. 간단히 말해, 사회의 크기가 커질수록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만으로 모든 일처리가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두 가지 종류의 부담 경감 메커니즘이, 언어적 상호이해를 응축시키거나 아니면 대체하는 의사소통매체의 형식으로 형성된다.” 이를 조절매체라고 한다. 전자의 매체의 종류에는 책임능력(자율성에 대한 신뢰), 지식(타당한 지식에 대한 신뢰), 학문적 평판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매체들은 단지 “상호작용에서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대해 ‘예/아니오’의 입장표명을 해야 하는 부담을 제1심급에서만 경감”시켜줄 뿐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매체들은 모든 의사소통행위에 대해 즉각적으로 수용과 거부의 의사표시를 해야 할 부담만을 없애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오히려 문자, 인쇄기, 전자매체 등 “의사소통의 제반 기술”에 의해 “공론장(Öffentlichkeit)"의 형성에 기여한다. 요컨대 언어적 상호이해를 응축시키는 조절매체들은 오히려 더 풍부하고 확대된 형태의 의사소통행위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언어적 상호이해를 대체해버리는 조절매체는 그렇지 않다. 화폐와 권력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언어적 합의형성 과정을 회피한 채, 계산 가능한 가치의 크기에 따라 목적합리적으로 처신하도록 행위를 코드화하고, 다른 상호작용 참여자들의 결정에 대해 일반화된 전략적 방식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들이 생활세계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행위조정을 대체해버림으로써 생활세계는 더더욱 그 필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이로 인해 근대사회는 상호작용들의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매우 복잡하면서도 광범위한 상호작용의 망을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근대사회에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가 조절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조절매체를 통해 분화된 하부체계들과 함께 체계의 메커니즘은 독자적이고 규범에서 자유로우며 생활세계를 벗어나는 사회구조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렇게 분화되어 나간 체계 메커니즘은 생활세계를 단지 자신의 하부구조의 하나쯤으로 축소시킨다. 하버마스는 이런 점에서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즉 “합리화된 생활세계는 하부체계들의 발생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하부체계들의 자립화된 명령이 역으로 생활세계 자체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부속화(Mediatisierung der Lebenswelt)라고 말한다.


 이러한 부속화는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따라 점점 분화되고 복잡해지는 체계가 여전히 생활세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새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는 체계분화의 메커니즘은 생활세계에 닻을 내리고 … 제도화되어야 한다.” 즉 체계의 분화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체계들은 사회 속에서 승인된 제도적 복합체로서 안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수준의 체계분화가 제도화되기 위해서는 행위갈등을 도덕적-법적으로, 즉 합의에 따라 규제하는 핵심적 제도영역이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요컨대 어떤 체계의 분화가 진행될 때 체계는 한 사회에서 제도화되어 안정화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생활세계에서 의사소통적 참여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도덕과 법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승인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체계는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역으로 생활세계의 도덕과 법을 자신의 정당화수단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체계 메커니즘의 발전은 부속화에 멈추지 않는다. 체계는 생활세계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물질적 재생산과 발전을 위한 도구로써 이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때 “생활세계를 도구화하는 재생산 압박은 생활세계가 갖는 자족성의 가상(Schein der Autarkie)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의사소통 행위의 미세한 구멍들로 숨어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근대사회에서는 그 어떤 영향력의 행사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에 대한 체계의 도구화 작용 역시 인간의 상호작용적 의사소통 속에서 승인된 합의의 형태를 띨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기만의 성격을,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허위의식의 성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허위의식으로부터 “그 자신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능한 상호이해의 상호주관성 형식을 장악하는 하나의 구조적 폭력이 생겨난다.” 이제 이 구조적 폭력은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해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되는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가 단지 주어진 것으로, 다시 말해 전형적 방식으로 미리 결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의사소통 참여자들에게 강제한다.


 하버마스는 이처럼 체계의 폭력에 의해 의사소통 참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선험성을 갖는 객체로서 등장하는 것을 상호이해 형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상호이해 형식은 근대 이전의 사회형태들에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과 달리 근대적인 형태의 상호이해 형식은 생활세계의 규범적 제한으로부터 온전하게 분리되어 생활세계를 거꾸로 지배하려 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결과적으로 “체계 메커니즘은 합의에 의존한 행위조정이 대체될 수 없는 영역에서도, 그러니까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도 사회통합의 형식을 밀어낸다. 그러면 생활세계의 부속화는 식민지화(Kolonialisierung)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루카치의 사물화를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로 인해 “체계에 의해 유발된 생활세계의 병리현상들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정식화”한다.


 그러나 이런 하버마스 식의 사회에 대한 역사철학적 전개는 두 가지 지점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노출하게 된다. 첫째, 체계의 변혁에 대한 거의 모든 논의가 차단되게 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체계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어 탈규범화되고, 탈정치화된 자족적 메커니즘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이러한 수준의 체계분화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 국가는 전체 사회의 경제를 조절하는 기능을 넘겨주게 되는데, 이제 화폐 매체가 그러한 기능을 전문적으로 맡게 되며, 규범적 맥락에서 벗어난 한 하부체계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주장에 따르면 체계, 특히 근대의 자본주의적 경제체계는 생활세계의 합리화라는 역사철학적 과정에 따라 등장하게 되며, 동시에 그 자신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할 뿐이다. 그리고 생활세계는, 다시 말해 인간들의 의사소통적 실천은 이러한 발전논리에 대해 간섭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변혁은 불가능하다. 물론 하버마스는 “화폐나 권력과 같은 조정메커니즘을 생활세계에 닻을 내리게 하는 제도들이, 생활세계의 영향력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행위영역 쪽으로 흐르도록” 해야 하며, 이로써 “체계보존을 생활세계의 규범적 제약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한 마디로 자본주의라는 맹수를 잘 가둬놓을 수 있는 더 튼튼한 도덕적-법적 철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체계는 언제나 “생활세계적 지평을 결정적으로 뚫고 나가버린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적 경험이다. 베버의 관료제적 합리화와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은 생활세계가 체계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왜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고작해야 단발적인 승리들만을 가져다줄 뿐인지를 보여준다. 요컨대 하버마스에게서 적극적 변혁의 동력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다. 물론 그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겠으나, 체계와 생활세계의 이분법은 사회의 많은 부분들을 체계라는 이름으로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설정하고, 단지 그것에 대한 통제방안만을 마련하도록 만들게 된다. 이제 더 착한 관료제, 더 착한 자본주의를 향한 기획만이 좌파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20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의 철학적 표현에 불과함은 물론이다.


 둘째, 생활세계는 단지 체계의 식민지화에 대항하는 방어적이고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개념으로만 머무르게 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 사회의 문제는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위해 분화된 체계가 역설적으로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하는 병리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근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생활세계를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체계가 식민지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생활세계는 지켜야 하는 것, 파괴적 진보로부터 보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제 진보와 좌파는 단지 생활세계를 지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다. 평화헌법을 둘러싼 일본의 좌파와 극우 사이의 논쟁은 체계와 생활세계를 둘러싼 역학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띤다. 일본의 좌파는 평화헌법을 ‘보수하고자’ 한다. 반면 극우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보통국가 일본으로 ‘진보하고자’ 한다. 이러한 좌파와 극우 사이의 거꾸로 된 것만 같은 역학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진보와 좌파 세력은 모든 선거에서 단지 개헌의 저지선인 의석의 3분의 1을 겨우 넘기는 선에서만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로 돌아와서, 체계의 지배에 대항해 생활세계를 회복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게 된다면, 특히나 그 회복이 체계가 단지 생활세계와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라면, 좌파는 단지 생활세계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힘밖에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체계 또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정하되, 단지 그것이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선을 설정하는 데 만족해버리고 만다. 그럼 점에서 그는 혁명가이기는 하되, 방어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항으로서 포장될 수는 있을망정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과연 자본주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의 메커니즘인가? 좌파는 이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안적 실천들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포도를 따먹지 못했다고 하여 돌아설게 아니라, 어떻게든 울타리를 해체하고 넘어서서 포도를 따먹고자 해야 한다. 울타리 너머, 자본주의 너머를 향하지 않는 좌파적 기획이 좌파가 천천히 죽어가도록 만들었음을, 우린 서구의 중도좌파정당들의 몰락 속에서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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