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Baudrillard - 소비의 사회
우리는 매일 소비를 하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돈을 지불하지 않고 TV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볼 때에도 우리는 시청률 또는 조회수라는 이름으로 소비행위를 하고 있다. 즉 우리는 소비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소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러니까 소비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떻게 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하는가? 보드리야르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소비를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파악했다.
보드리야르가 파악한 소비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은 행복에의 타고난 성향 때문에 욕구를 가지는 존재이고, 따라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성장을 추구하고, 따라서 성장의 결과인 풍요 속에서 욕구의 완전한 충족을 가져오는 소비를 행하고, 따라서 풍요로운 소비 속에서 인간은 욕구의 진정한 충족을 통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보드리야르는 바로 이 논리가 현대의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논리라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행복은 소비사회를 절대적으로 보증하는 것이며, 글자 그대로 구원(salut)과 동의어”이다. 즉 행복은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반이자 소비사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지만 행복이 가지는 이러한 힘은 단순히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소박한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힘이다. “사회적,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행복의 신화가 평등의 신화를 집대성하고 구체화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근대가 도래하면서 평등은 최소한 그 외양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은 본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자본주의 체계가 발전하면서 단순히 소비사회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의미로 매우 협소하게 축소되었다.
그런데 이때 “평등주의 신화의 담당자가 되기 위해서는, 행복은 계량 가능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 물질적 안락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평등에의 요구가 가장 협소한 의미로 축소될 때, 행복은 단지 수량이나 화폐량과 같은 가시적인 특정 기준들에 비추어서만 평등한지의 여부가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평등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정치적 발언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이때 평등한 정치적 발언의 권리란 어떤 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모든 사람이 1번씩 국회 발언대에서 말하면 평등하게 정치적 발언의 권리를 가진 것일까?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 많은 발언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평등한 것 아닐까? 이처럼 평등은 직관적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매우 복잡하고 그 자체로 매우 정치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평등은 쉽게 그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성격이 기각된 채 가시화될 수 있고 계량 가능한 것에서의 평등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평등이 기계적인 수치상의 평등으로 전락하게 될 때, 행복은 언제나 밖으로 꺼내어져 저울 위에 올려질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될 것을 강요당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가득 찬, 즉 내면적인 즐거움으로서의 행복-다른 사람들의 눈에 또 우리의 눈에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와는 상관없는 행복,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복-은 따라서 소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단번에 제외된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원리는 능력, 책임, 사회적 기회, 결국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행복에 대한 실제적인 평등에서 사물과 사회적 성공 및 행복의 명백한 그밖의 기호 앞에서의 평등으로 이전되었다. 그것은 스탠딩(standing)[사회적 지위 및 생활수준]의 민주주의, 텔레비전, 자동차 및 스테레오 세트의 민주주의, 외관상으로는 구체적이지만 실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다. 이것은 사회적 모순 및 불평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들어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일치한다. 이 두 개의 민주주의는 서로에게 알리바이 역할을 하며 서로 결합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의 부재(不在)를 전면적으로 은폐하는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처럼 왜곡된 평등의 신화 속에서 왜곡된 행복 개념은 욕구 개념과 결합한다. 욕구 개념은 또 다른 종류의 왜곡된 평등을 약속하는데, 욕구 개념 앞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역사적 불평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욕구는 사용가치에 따라 정해지는데 이러한 사용가치는 갑부에게나 거지에게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사물과 재화의 사용가치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행복과 욕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평등의 신화는 이제 풍요를 향한 성장의 논리를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실제로 그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성장은 “점점 더 큰 평등으로의 지속적이고 착실한 진보”로 포장되어 풍요로운 사회로 전진해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성장 논리 속에서 빈곤과 불평등은 단지 아직까지 성장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해소되지 않은 “남은 찌꺼기(résiduelle)”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성장의 논리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량으로서는 보다 많은 소득과 재화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지만, 경제성장의 중심 자체에 확립되는 것은 왜곡과정이며, 성장에 구조와 그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이 왜곡비율이기 때문이다.” 즉 경제성장 그 자체가 빈곤을 “경제성장의 일종의 밑자락 장식(volant)으로서 또 전면적인 부유함을 위한 필수적인 일종의 원동력으로서 기능적으로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풍요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항인 빈곤이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 빈곤이 없다면 풍요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100억씩을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풍요롭다고도 빈곤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체계가 일정비율의 왜곡 주위에서 안정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부의 절대량이 어떻든지 간에 체계적인 불평등을 포함하면서 안정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생산된 재화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단지 기능적 잔여물일 수 없다. 빈곤은 오히려 성장 자체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성장 자체가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성장사회를 “‘불평등한’ 사회질서, 즉 특권계급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가 자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전략적인 요소로서 성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사회가 등장한 것은 “전체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주의적 원칙(이것은 풍요와 복지의 신화에 의해 떠받쳐진다)과 특권 및 지배 질서 유지라는 근본적인 지상명령 사이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성장사회에서 “민주화의 몇 가지 징후는 체계의 생존가능성에 필요한 알리바이”로서 기능할 뿐이다.
이상의 논의 속에서 우리는 이제 성장의 신화를 폐기해야 한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산업체계가 “불균형과 구조적 궁핍에 의해 생존하며, 체계의 논리는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완전히 양면적(ambivalente)”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계는 “부와 빈곤을 동시에 산출해내고, 충족을 만들어내는 만큼 불만족도 산출해내며, 또 ‘진보’를 산출해내는 만큼 공해도 유발하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다. 체계의 유일한 논리는 살아남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체계의 전략은 인간사회를 불안정한 상태, 끊임없는 부족(不足)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체계의 이런 전략은 체계가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해 선험적으로 적대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체계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만을 알고 있을 뿐 사회와 개인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절대적 빈곤을 완화시킨 것은 사실이 아닌가? 보드리야르 역시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빈곤의 개념은 단순히 현금의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생존과 생활필수품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균질화된 현대사회에서는 풍요와 빈곤을 가르는 가치의 왜곡과 불평등은 다른 차원으로 이전(移轉)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과 권력은 바로 이런 왜곡과 불평등이 이전한 새로운 영역이다. 따라서 노동유형을 선택할 권리, 자연을 향유할 권리, 공간에 대한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이 출현하는 것은 “이 권리들과 연관된 요소들이 계급(또는 카스트)의 차이표시 기호 및 특권의 지위로 이행하였다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이는 객관적인 사회적 진보의 징후가 아닌 “모든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가치가 점차 생산형태로, 다시 말하면 (1) 경제적 이윤의 원천, (2)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자본주의 체계의 진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논리 속에서 사물들은 그 자체로서의 사용가치 때문에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의 집합적 배치와 전체적인 모습, 이 사물들의 서로간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의 전체적인 사회적 ‘원근법’만이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항상 차이표시적인 의미이다. 사물들은 이 구조적 규정을 기호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반영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존재하는 어떠한 사물도 이러한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체계는 “사물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모든 것(사상, 여가, 지식, 문화)에 사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신숭배적 논리가 바로 소비의 이데올로기다.” 바로 이 물신숭배적 논리로 인해 “그 엄청난 수(數), 쓸데없는 장식, 없어도 되는 것, 지나친 형태, 유행의 작용,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 모든 성질을 통해 사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본질-지위-을 흉내낸다.”
이러한 시각에서 소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1. 소비활동이 포함되고 의미를 갖게 되는 코드(code)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으로서의 측면.” 물론 이러한 코드는 자본주의 체계가 부과한 코드이지, 하버마스적 의미에서 생활세계에서 참여자들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생산되는 코드가 아니다. “2. 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으로서의 측면. 이 경우 기호로서의 사물은 코드에서의 의미상 차이뿐만 아니라 서열에서의 지위상 가치로서도 정리된다.” 따라서 “소비는 도덕(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의 체계)인 동시에 의사소통의 체계, 즉 교환의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비의 이런 측면들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소비자는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또 자신의 선택에 따라 타인과 다른 행동을 하지만, 이 행동이 차이화의 강제 및 어느 한 코드에 대한 복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타인과 자기를 구별짓는 것은 동시에 항상 차이의 질서 전체를 만드는 것이 되는데, 이 질서야말로 처음부터 사회 전체가 해야 할 일이며, 좋든 싫든 개인을 초월한다. 각 개인은 차이의 질서 속에서 점수를 얻어 질서 그 자체를 재생산하며, 따라서 이 질서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항상 상대적으로만 기록된다.”
이렇게 소비가 이해될 때 소비는 향유를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 인식될 수 있다. “향유는 이제 더 이상 합목적성, 합리적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혀 아니며, 그 목적이 딴 데 있는 과정의 개인적 수준에서의 합리화로서 나타난다. 향유라는 것은 아마도 자율적이고 합목적적이며 자기목적으로의 소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즐기지만, 그러나 소비할 때는 결코 혼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연루되는, 코드화된 가치들의 생산 및 교환의 보편화된 체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비는 주체적인 향유가 아닌 수동적인 순응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욕구는 단순히 개인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모든 욕구는 기호와 차별에 대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구에 따라서 재조직된다.” 즉 인간의 욕구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체계의 논리의 생산물인 것이다. 무한하게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는 코드화와 차이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그러한 코드에 순응하여 차이화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를 무한하게 발생시킨다. 자본주의 체계는 “무언가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자극함으로써 이러한 욕구들을 만들어낸다. 마케팅이라고 표현되는 자본주의 체계의 선전전략은 바로 이 공포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위세를 확인하게 하면서 타인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욕구의 체계는 생산체계의 산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욕구의 증가는 항상 자본주의 산업체계 전체의 생산력을 초과한다. 왜냐하면 생산력 증대에 따른 “균질화와 상대적인 ‘민주화’는 더욱더 격렬한 지위 추구 경쟁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똑같은 상태에 놓여있을 때, 인간은 남들과 차별화되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와 생산력 간의 불균형은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상품에 부여하게 되고, 이로 인해 “빈핍성적(貧乏性的) 긴장인 ‘심리적 궁핍화’”가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구조적 빈곤, 즉 언제나 차이화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희소성으로 인해 그렇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빈곤이야말로 경제성장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빈곤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 속에서 욕구란 개인의 욕구라기보다는 체계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체계의 욕구이다. 단지 체계의 욕구가 개인의 욕구라는 알리바이 뒤에 숨어버린 것일 뿐이다. 이를 보드리야르는 “욕구의 조건지어짐”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에게 자연적 욕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독특한 개념인 소비는 그러한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원시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소비사회는 결코 풍요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원시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과다할 정도의 증여와 상징적 교환체계이다. 그리고 이처럼 “집단 전체로서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음(imprévoyance)’과 ‘낭비성’은 진정한 풍요의 표시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회는 희소성과 소비강박에 시달리는 사회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낭비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우리는 풍요의 기호(signes)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기구를 통해,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쫓아낸다.” 풍요와 빈곤은 절대적인 재화의 양적 수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 보다 정확히는 인간들 간의 상호신뢰에 있는 것이다. 원시사회가 풍요로운 사회라면, 그것은 재화의 양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적은 양의 재화로도 그것이 인간들 간의 신뢰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함으로써 보편적 부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는 인간을 균질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개성을 찾도록 촉구한다. 물론 이때 개성이 인간들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개성화는 오로지 상품들 사이에 부여된 차이화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상품들이 가지는 관계적인 위계 속에서 하나의 상품과 그 상품이 내포하는 지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이를 소비함으로써만 개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적인 모든 차이와 특이성(singularité)을 포기하는 것이다. 특이성은 타자 및 세계와의 구체적인 대립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소비라는 것은 우선 처음에 개인적 욕구를 지닌 개인을 중심으로 질서지어지고, 이어서 이 욕구가 권위 내지 순응의 요청에 따라서 집단의 문맥상에 지수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는 우선 먼저 차이화의 구조적 논리가 있으며, 이 논리가 개인들을 ‘개성화된’ 것으로, 즉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낸다. … 개인이라는 항목에 대한 독자성/순응주의의 도식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수준의 문제이다. 근본적인 논리는 코드에 지배된 차이화/개성화의 논리이다.”
소비사회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코드화에까지 전진한다. 남성 모델과 여성 모델을 통해 만들어내는 기능적 남성다움과 기능적 여성다움의 규정과 이러한 규정을 정점으로 하는 차이의 위계는 “소비를 질서잡는다.” 기능적 남성다움은 씩씩함, 까다로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 등과 관련되어 다른 남성과 차별화된 엘리트로서 남성을 드러내는 것, 즉 “‘투기적(鬪技的)’이며, 결투와 비슷한 특히 ‘고귀한’ 행위”로 규정된다. 이와는 반대로 기능적 여성다움은 “(일부러 꾸민) 자연스러움, 에로티시즘, 육체의 ‘선(線)’, 요염함 등의 지수적(指數的) 가치”들과 연관되어 남성들의 경쟁 속에서 가장 많이 선택되는 것으로서 규정된다. 이런 여성다움의 가치들은 자립적이지 않고 언제나 남성에 의해 좋은 것으로 규정될 때만 가치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파생적, 대리적(代理的) 가치”들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하의 소비사회가 인간의 신체를 남성(다움)-여성(다움)으로 코드화할 때 이는 실제 현실 속의 성별 및 사회적 범주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기능적 모델에 가까워지도록 개조할 것은 강요당하며, 이를 돕는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유혹당한다. 나아가 이렇게 기능적 모델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진정한 개성의 발현이며, 따라서 진정한 자기만족을 위한 길임을 선전당하지만, 이는 그 진정한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독자성의 향유가 아니라 집단적 특성의 굴절된 모습”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러한 소비사회에서 소비자는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계의 재생산에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체계는 노동자(임노동)로서의, 절약가(세금, 부채에 의한)로서의 인간을 필요로 하지만, 소비자로서의 인간은 더욱더 필요로 한다. … 오늘날 요구되고 또 실제로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은 소비자로서의 개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 노동-노동자의 역할과 비교해본다면 “소비는 사회적 노동”이고, “소비자는 … 노동자로 필요되고 또 동원되고 있다.”
따라서 소비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을 소비자로서 정체화하기 위해 소비인간으로 교육받고 훈련받는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유를 의무로 삼는 존재로, 향유와 만족을 꾀하는 존재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향유와 만족은 그 본래적 의미가 아닌 왜곡된 의미이다. 따라서 소비사회는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을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보드리야르는 이에 대해 19세기에 농촌인구를 산업노동자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행해진 훈련이 20세기에는 소비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훈련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인 것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재생산이라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회는 진보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형태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소비사회로부터의 해방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보드리야르는 그러한 해방의 주체로서 소비자가 호명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소비사회 속에서 소비자는 다른 소비자들과 연대하기보다는 파편화되어 끝없는 차이화 기제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구조적 피착취자의 입장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연대하여 변혁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노동력의) 박탈에 의한 착취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집단적 영역에 관계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계부터는) 사람들을 연대(連帶)하게 한다. 착취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의식을 일으킨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물질적 요소인 상품을 분업 시스템 속에서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비록 소외된 형태일지라도) 항상 다른 노동자들과 협업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이런 노동의 특성상 노동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와 동류의 사람들, 즉 착취당하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인 한에서는, 사람은 다시 고립되고 뿔뿔이 떨어져서 기껏해야 서로 무관심한 군중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소비는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 이 상품을 살 때 바로 당신은 여러 가지 힘과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소비사회에서 소비를 부추기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다. 이런 전략 하에서 상품은 언제나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소비의 대상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따라서 소비의 결과에 대한 논의 역시 개인적인 감정과 소비의 지속 또는 중단이라는 수준에서 맴돌게 된다. 다시 말해 “소비는 우선 개인적 대화로써 행해지며, 개인적 만족 및 실망과 함께 이러한 최소한의 교환 속에서 종적을 감춰버린다.” 요컨대 노동은 노동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지만 소비는 소비자들을 고립시킨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소비자들은 소비자인 한에서는 19세기 초의 노동자들이 그러했던 바와 같이 무의식적이고 비(非)조직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소비자들에게 변혁의 희망, 특히 개인적인 변혁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소비자임이 과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열정적인 순응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보드리야르는 이 지점에서 손쉽게 너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말았다. 생산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자임에 대한 자각이,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자신들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음에 대한 자각이 만들어내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 바로 파업이다. 파업은 노동의 거부, 즉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의 거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업은 최소한 현상적으로는 변혁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의 선도적인 혁명이라는 투의 거대한 의미부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도 인정했듯이, 파업은 노동시간의 단축 또는 임금의 상승 등 지극히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기반해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를 노동계급의 문제를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변혁으로 연결시켜나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일종의 계기가 노동자의 노동자임에 대한 자각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소비자임에 대한 자각은 노동자들이 보여준 연대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안티조선 운동, 남양유업 불매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의 불매운동들은 소비자의 소비자임에 대한 자각이 어떠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노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비자는 소비의 영역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주요 행위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대한 소비자의 자각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 바로 불매운동이다. 즉 불매운동은 파업의 경우와 동일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불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과 달리 단순히 상품의 허황된 약속에 속은 것에 대한 실망으로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비자가 자신의 소비자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이로부터 무언가를 관철시키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더구나 보드리야르의 예측과는 달리 소비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연대했다. 그것도 매우 효과적으로.
물론 이러한 불매운동이 관철시키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아닌 단지 더 따뜻한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불매운동에 대한 소비자들의 참여가 매우 감정적이고 일시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불매운동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엉뚱한 피해자들만 양산하고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를 흐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아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이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기보다 관성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이익에만 몰두하는,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문제들을 흐려버리는 노동조합들과 좌파정당들의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파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 역시 어느 정도 감정적인 요소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동자 역시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이성과 합리만을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단 한 발자국도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해왔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자본주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것인 이상 그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지만 파업의 직접적인 상대자가 아닌 엉뚱한 피해자(그러나 사실 이들은 엉뚱한 피해자가 아닌 체제의 공모자일 것이다)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소비자들의 불매운동과 노동자들의 파업 또는 그 어떤 것이든 더 좌파적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들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전자를 깎아내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불매운동이 가지는 현상적인 목표 넘어 근본적 목적을 파악하고 이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근본적 변혁으로 연결하려는 실천들을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불매운동이 가지는 근본적 목적의 혁명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과 독재에 대한 옹호와 미화를 서슴지 않는 언론, 을들에 대한 갑질을 일삼는 기업,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불매운동들은 물론 방금 제시된 문제들에 대한 지적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불매운동을 추동하는 보다 근본적인 동력은 평등을 실천하라는 강력한 보편주의적 요구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인간의 평등을 무시하고 불평등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이 보편주의적인 요구야말로 그 어떤 프로파간다보다도 혁명적이다. 평등을 요구하고 실천하는 것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이 모든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세계에 거대한 파열음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매운동은 평등을 요구하는 혁명적 소비자들의 자각과 연대의 힘이다. 물론 이러한 평등에의 요구는 극우 포퓰리즘이나 감상적 민족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거대한 이 소비자들의 힘을 어떻게 좌파적 비전으로 연결해나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성 좌파가 소비자들의 이 힘과 평등에의 요구를 방치했을 때 나타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도널드 트럼프, 마린 르펜, 보리스 존슨, 마테오 살비니, 자이르 보우소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