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 Nov 04. 2019

존재와 앎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서든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계기는 정치라고 불리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 이후였다. 내가 정치활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치가 옳은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고 함께한 노동자들, 빈자들, 여성들의 존재와 나의 존재 사이에는 단지 학습과 실천이라는 두 단어로 메꿀 수 없는, 아니 애초에 메꾼다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관성적인 발화와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었고, 나아가 활동들 자체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모든 연락을 끊고 도망치듯 휴학했다. 이 글은 그로부터 이루어졌던 내 나름의 사유의 거친 밑그림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린다. 그렇게 내려진 답을 우리는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물론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하나의 정체성만 갖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일까? 나는 인간-황인종-한국인-남성-성인-이성애자-장애인-대학생-… 등등 수없이 나열될 수 있는 정체성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정체성들의 나열은 내가 누구임(Who)을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내가 무엇임(What)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정체성들로 우리를 표현하는 순간 표현된 정체성들은 언제나 그것들로 표현되지 못하는 다른 나의 모습들을 배제한다.


 언어화되어 표현된 어떤 종류의 정체성들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에토스(Ethos), 즉 나의 행동과 습성들을 통해서뿐이다. 하지만 에토스가 나의 누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존재와 앎이라는 두 가지 외부적 계기와 연결되어야 한다. 에토스라는 개념이 단지 사변으로 머물지 않고 땅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존재와 결합되어야 한다. 더불어 한 존재의 삶 전체에 걸쳐서 에토스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러한 에토스가 그 존재 안에서 반복되도록 추동하는 앎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존재와 앎에 대한 앎은 결국 다시 언어의 문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때 존재와 앎을 다시 어떤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정체성들이 가지는 문제점을 다시 존재와 앎이 가지는 문제점으로 옮길 뿐이다. 따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와 앎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존재는 A라는 특성을 가진다’, ‘나는 A라는 것을 안다’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와 앎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는 B라는 특성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B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와 앎을 파악하는 것이다. 전자를 포함명제, 후자를 배제명제라고 하자. 물론 포함명제든 배제명제든 무엇임 또는 무엇이지 않음이라는 방식으로 존재와 앎을 규정하려는 것이 언어가 가지는 근본적인 권력효과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 엄밀히 말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언어적인 대답은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결국 언어 자체에 대한 거부가 불가능함을 받아들인다면, 존재와 앎에 관한 배제명제가 가지는 두 가지 유용성은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한다.


 첫째, 배제명제는 포함명제에 비해 우리의 존재와 앎, 그리고 이로부터 형성되는 나의 에토스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효과들을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내 존재는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 ‘나는 페니스를 가진 존재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앎에 대해 안다’ 등의 포함명제들에서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참조하여 나의 존재와 앎을 알고, 이러한 앎 위에 나의 에토스를 형성한다. 이러한 포함명제들에서 타자의 존재는 없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타자의 존재가 은폐된다. 그리고 이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무관심, 나아가 혐오에까지 이르기 쉽다. 반면, ‘내 존재는 자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궁을 가진 존재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앎에 대해 알지 못한다’ 등의 배제명제들에서 나는 언제나 나 아닌 타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나의 존재와 앎에 대한 앎은 타자와 불가피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앎에서 형성되는 에토스는 언제나 나의 ‘한계’에 대한 민감한 자각과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참조에 기초하게 된다.


 둘째, 존재와 앎에 관한 배제명제는 정체성에 관한 배제명제에 비해 에토스의 형성에 더 많은 자율성과 다양성을 부여한다. 예컨대 ‘나는 여자가 아니다’라는 배제명제는 쉽게 이분법적인 사유방식으로 흘러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내 존재는 자궁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배제명제는 그보다 더 넓은 다양성을 인정하며, 따라서 에토스가 이분법적으로 고정된 형태로 형성되기보다 더 자율적으로 다양하게 형성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나는 여자를 알지 못한다’와 ‘나는 자궁을 가진 존재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앎을 알지 못한다’의 차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존재와 앎에 관한 배제명제의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찾아나가는 방법은 최소한 한 가지 문제점을 노출할 수 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낳을 수 있다. 분명 배제명제의 방식은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한계를 설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만약 배제명제의 방식을 끝없이 확장시키면 이런 한계를 실천적인 한계로까지 받아들임으로써, 나로 하여금 내 존재와 관련이 없고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과 연관된 모든 실천들에 대해 ‘나는 알 수 없으므로, 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중단해버릴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정치와 공동선에 관한 모든 기획을 폐기해야만 한다. 


 어떻게 존재와 앎에 관한 배제명제의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맺기와 연대의 실천을 만들어내고 강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반드시 인간의 평등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긍정으로부터 찾아져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혁명적 소비자의 등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