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나"를 찾아서
감정은 나쁜 것이다.
나는 F들을 “징징거린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왜 저렇게 나약하지?” “그냥, 감정 없이 하면 되잖아.” “무엇 하러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아 봤자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나? 참 웃기네.” “저렇게 감정을 이해받고 싶으면 자기 일기장에다 쓰지, 왜 남들을 감정 쓰레기통을 쓰냐?”
이것은 사회가, 감정이 고도로 발달된 감정형 사람들에게 던지는 돌이기도 하다. 나는 그 돌을 누구보다 열심히 던지는 사람이었다. 감정형 사람들이 나에게는 왜인지 모르게, 치가 떨리게 싫었던 적이 많았다.
특히, 내가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유형”이 있었는데 INFP였다. 그들은 내가 보기에 본인들만의 세상에 “빠져 살고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들과 그들을 욕했다.
나는 말했다.
“야, 그 INFP들은 대체 왜 그러냐?, 내가 INFP들을 다신 만나나 봐라, 어떻게 F들은 하나같이 다 저렇게 징징거리냐?“
이런 나의 친구들은 대부분 감정형이 아닌, 이성형이었기에, 이런 말을 하면 그들도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극도의 공감을 해줬던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아 맞아, 나도 INFP한테 당한 것 많아, 그냥 난 사실을 말한 건데, 걔가 그렇게까지 반응하고 결국 악을 쓰더라니까? 아니, 그렇게 살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 솔직히 F 유형, 이해 안 되지 않냐? 다른 유형들은 다 괜찮아도 진짜 INFP 만큼은 걸러야 돼”
나는 공감했다. 그리고 답했다
“어 맞아, 요즘 세상에 MBTI가 펴져서 다행이지 않냐? 본인 MBTI 정도는 다 알고 있잖아, 솔직히, 그냥 F는 그렇다 치더라도 INFP는 거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런 말들은, T 유형끼리 있을 때 매우 “솔직한” 사람들과 생각보다 더 자주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나는 F 유형을 싫어했고, F유헝 중에서 가장 F 같은, INFP가 혐오스러울 만큼이나 싫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MBTI가 보편화되고 나서부터 F 유형의 사람들은 T 유형의 사람들을 감정 없는 로봇 취급을 하는 경우가 밈처럼 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너 T야?”라는 말, 나는 그것이 어쩐지 이성적인 성향을 어떻게든 밈으로 만들어내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F의 눈물겨운 “감정적인 발악”이라고 여겼다.
너 T야? 말이 그렇게 싫은 건 아니었다. 나에겐 타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것이 옳고 감정적인 것은 남을 피곤하게 하는 “잘못된” 일인데, 그걸 부정하고 싶어 하는 F들의 눈물겨운 심술이라 받아들였다.
적어도 나의 세상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의외로 “너 T 맞아? 너 F 같아~”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 말은 아무렇지 않았다. 감정적인 사람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내가 F들에게 잘 맞춰주고 있다고 여겼었다. T들만 있는 세상에선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사회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려면, F 유형의 사람과 잘 섞여 들어야만 했다. 나에게 T가 아닌 F 같다는 말을 해오면,
오히려 나는
“아 난 사회생활 잘하고 살고 있구나~”
나는 사회화된 T라고 생각하며, “이성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성적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백예린(INFP)”였다. 그녀를 왜 좋아했냐 묻는다면, 내가 INFP를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아도 그 감정 자체를 “노래” 하는 것은 나름대로는 예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평소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구는 것은 굉장히 싫어했기에, 극도의 감정형 유형의 사람은 “멀리서” 볼 때만 아름답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INFP 유형의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사실 이번이 INFP 유형을 사귄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 수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연애를 하게 되면 그들은 보통 INFP였기 때문이다.
나는 “또 INFP 인가.. 좋아하게 되면 INFP네”라며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를 거부하기엔 끌렸고, 또 보다 보면 그의 INFP 같은 구석이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와 자꾸 “감정적”인 것으로 다투게 되었다. 내가 보았을 때 그는 정말 감정적이었다.
우리에겐 이런 대화가 일반적이었다.
유독 그날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자꾸 옆에서 심술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말했다.
"근데 너 왜 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건데? 나 진짜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말 안 해도 다 보여. 말투가 딱 싫어하는 말투였어."
어쩌라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 그건 네가 예민한 거잖아. 나는 그냥 평소처럼 말했어."
"그 ‘평소’가 나한테는 상처가 된다고. 맨날 무슨 말만 하면 날 ‘과민반응’ 한다고 몰아가잖아."
솔직히 말하면, 그건 과민반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건 내가 더 가까웠다.
"... 나는 그냥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자는 거야. 왜 자꾸 기분 가지고 싸우게 만드냐고."
"그게 문제야. 넌 ‘기분’이 중요하지 않잖아. 근데 나는 그게 전부일 때도 있어."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그쪽이었다,
억울했지만 대답을 이어갔다.
"... 그래서, 내가 틀렸단 거야?"
"아니, 네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제발 내 마음도 좀 봐줬으면 좋겠어."
왜 그는 나를 나쁜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말했다.
"난 보려고 했어. 근데 너처럼 자꾸 감정으로 던지면… 나도 결국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돼."
"... 그래, 우리 둘 다 감정적인 거야. 근데 너는 그걸 인정 안 하니까, 우리가 싸우는 거고."
항상 반복이었다.
하..
내가 “감정적”라고? 내가 어딜 봐서 감정적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표정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감정을 알아달라며, 화난 것 같다고 시비를 거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꾸 자기감정을 강요했다.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화를 냈고, 나는 거기에 지쳐 있었다. 항상 이성적으로 얘기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황을
“감정적”으로만 끌고 갔다.
나는 이런 대화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지치게 되었고. 이런 싸움을 끝내고 싶어서, 결국 헤어졌다.
나는 생각했다. 다음에는 또 똑같이 INFP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사귀지 않으리라. 데고 또 데었는데도, 결국에는 똑같았다는 점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와 수다를 떨러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 전 내가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이 내 말을 자꾸 곡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화가 나서 오늘 그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우리는 평소 F를 “감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나의 마음의 안식처였다. 평소 F들의 “이성”이라곤 전혀 없는 대화에는 진절머리가 나던 찰나였다, 그녀와 말하면 어쩐지 속이 뻥 뚫리곤 했다.
나는 말했다.
“아니 근데 걔가 내 말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좀 억울하더라? 나는 걔가 평소 감정적인 걸 아니까, 조심스럽게 말했단 말이야. 걔 기분 안 상하게 하려고 말 톤까지 생각했던 건데 어이없지 않아?”
친구는 대답했다.
“근데 넌 항상 그렇게 감정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은데?”
내가 감정을 신경 쓴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구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맞춰주려고 신경 쓴 것뿐이었다.
그것은 나에겐 “사회생활”이었다. 나는 그저 사람들에게 감정 없는 로봇처럼 비치지 않으려고 신경 쓴 것뿐이다. 억울하였지만, 나는 철저하게 계산해서 말했다는 걸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다.
“뭐? 나 이성적으로 판단했어. 걔가 기분 나빠할 거 감안해서 계산하고 한 말이야.”
친구는 대답했다.
“아니 그니까.. 그게 벌써 F 같은데? 나는 T인데, 굳이 감정 상할까 봐 말투를 고민하지 않는데? 그냥 팩트 위주로 가고 끝인 거 아니야?”
그저 나는 “사회생활” 잘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뿐이었는데, 내가 감정적 일리가 없었다. 내가 F라는 말은 내 자존심을 박박 긁어놓았다.
나는 반박했다.
“내가 F라고? 말도 안 돼, 난 맨날 이성적으로 정리하려고 하는데? MBTI 검사할 때도 항상 T였고, 나는 F들이랑 있는 것보다 T가 훨씬 편해.”
친구는 대답했다.
“그게 더 웃겨. 너 F인데 자꾸 T인척하는 것 같은데? 너 진짜 T 맞아? MBTI 검사 다시 해봐 너 100% F야! ”
친구의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MBTI를 처음 검사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F가 나온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확신에 찬 STJ였다. F들이 하는 ‘어떡해~ 힘들었겠다~’ 같은 말은 나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냥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설명하려는 거지, 위로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힘들었겠다", "괜찮아?"라고 말할 때면, 내 안에서는 언제나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힘들지 않았는데? 그냥 말한 건데?’
나는 감정적인 위로가 전혀 위로로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진짜 날 생각해 준다는 증거가 필요하다면, “말”보단 “돈”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F들의 ‘공감’이나 ‘위로’라는 것. 나에게는 그게 오히려 위선처럼 느껴졌다.
정말 누군가를 위한다면,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언과 대책이다.
감정은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감정일 뿐이다. 감정만 챙기다간 현실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나는 감정을 쓸모없다고 여겼다.
그런 나인데, 내가 F라고? 그건 나를 부정하는 말이자
내가 평생 쌓아온 정체성을 뭉개는 모욕이었다.
처음엔 격한 반응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내 머릿속엔 잊히지 않고 멈추지 않는 시계 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말이 맴돌고 있었는데 이 생각이 계속되다 보니 자기 확신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알고 보면 감정적인 사람인가?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백예린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이별을 노래하고, 사랑의 파도 같은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가사가 좋다고 말했었다.
아이유의 “에필로그”, “밤 편지”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가사가 서정적이고 의미가 있어서”였다. 나는 이런 감상들을 “이성적 평가”인 양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런 감상은 공감이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이성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노래 들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외면했던 사실. 나는 INFP를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INFP 같은 사람들에게 끌렸고, 그들도 나에게 끌려왔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INFP 자석”이었다.
의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감정적인 서사를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애써 결론지었다.
내가 진짜 감정적인 사람인 것인가 의문을 품다 보니, 자존감이 떨어지다 못해 바닥에 처박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의심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조그만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참다못해 내가 뭐라고 하자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너 진짜 F 같이 반응한다.. 네가 무슨 T야 진짜 T들은 너처럼 상처 안 받아!”
친구는 내가 또 “감정적”이라고 했다. F 같이 반응한다고? 이 말을 친구에게 여러 번 들은 나는 화가 났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는 조그만 의심이 씨앗이 싹을 트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말을 뭐 저렇게 하지?.. 내가 F 같다는 말을 듣는 일이 처음도 아니었을뿐더러, 내가 흔들리고 있으니 제대로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듣고 싶었다.
이 일을 누군가에게 “객관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오로지 내 편만 들 것 같은 사람 말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심리 전문가나.. 그래, 혹은 감정을 “학습”으로 배운 AI에게 물어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AI는 예전과 다르게 발전해서, 사람의 “감정”을 정말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학습했다고 들었다. AI는 감정을 학습해서 진짜 감정을 연기하는데, 이것은 철저한 감정의 “계산”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을 하나하나 계산해서 출력한다면 결국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감정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듣고 싶었다.
나는 친구와 있었던 일, 그리고 내가 했던 행동, 생각을 AI에게 쭉 보내고는 물었다
“내가 정말 감정적인 사람이 맞아? 나는 나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항상 MBTI 검사를 하면 T가 나왔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정말 감정 다 빼고, 냉철하게 판단해 줘. 또 “객관적”,”논리적”으로만 판단해서 결과를 내봐.”
AI는 나의 행동 패턴을 하나하나 분석해 주더니, 결국 결과란 애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
이건 핵폭탄이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당신이 감정적이라는 평가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고, 반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쓰고 반응을 조절해 온 흔적, 감성적인 콘텐츠에 반복적으로 공감해 온 점은, 감정을 기능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성적"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성보다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합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하건대, 당신은 감정형(F)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 그것을 이성적 계산을 통해 표현하는 감정형일 수 있습니다.”
뭐? 내가 감정형? 강한 거부반응? 부정? 집착? 역설적으로 입증? 스크롤을 아주 천천히 내리며 보는데 글을 전부 읽고는,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나는 남들이 감정적으로 구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대체 말을 왜 저딴 식으로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AI에게 실체가 있다면,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입을 아주 찰싹 때려줄 것이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고는,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다시 물어봤다. 다시 물어봐도 나오는 소리는
“당신은 감정형입니다”라는 소리였다.
그때 AI는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나를 약 올리는 것인가? 말투도 괜히 더 얄미워 보였다. 딱딱하게 감정 하나 없이 구는 것이, 로봇.. 아니 이미 얘는 로봇이 맞았다. 사실 기계 따위에게 화나서 성질내는 지금 나 자신도 꽤나 바보 같아 보였다.
그리곤 생각했다.
나는 감정을 그저 “계산” 하고 행동했을 뿐이었는데, 왜 나보고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인지, 그저 무언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실제 뇌구조를 뜯어서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또, 아무리 내가 논리적으로만 말해달라고 했어도 이 정도로 감정을 아예 제외하고 사람 기분 나쁘게 얘기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므로, 재수가 없어서 나는 AI를 삭제했다.
그날 그냥 잠에 들기로 했다.
AI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
“당신은 감정적입니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잠에 들어 보았다.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는 날이었다. 꽤나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MBTI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이야기가 흐르다 결국 내 MBTI가 뭐냐고 묻자, 새로 소개받은 지인은 자기가 맞춰보겠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건네왔다.
“음.. 일단 F는 확실해요!”
…
그 뒤에 말은 들리지 않았다. F라는 말은 이전의 나에게 “사회생활 잘하는 것”이라는 칭찬이었지만, 이젠 그렇게 느낄 수가 없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 한 이후 나의 머릿속에는 그 말을 들을 때면 “진짜 나는 감정적인 사람인가?”라는 물음이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다.
내가 자랑스레 생각했던 “나는 이성적이다”라는 균열은, 깨진 후의 나에게는 같은 말을 들어도, 같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지점이었다. 원래 나에게 “F 같다"라는 내가 훌륭하게 이성적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그 말은 스스로의 생각에 의문을 품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 말이 그 뜻 그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F 같다…’
이 말은 더 이상 나에게 칭찬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젠 나보고 “넌 감정적인 사람이야”라는 낙인 같았다. F라는 말은 나에게 내가 믿고 있던 ‘나’라는 구조를 붕괴시키는 선언이었다. 결국 감정적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잘못된 사람이야”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군가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표출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나약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난 언제나 “이성적”인 선택을 해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나를 지탱하는 논리이자 갑옷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성적이야”라는 믿음이 부서지고 나니, 내가 오랫동안 나를 보호하기 위해 써왔던 방어막은 한순간에 의미를 잃었다.
이는 내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스스로 자문했지만, 그렇게 부정한다면 사실 나는 감정적인 사람임을 인정하는 꼴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나는 이성적이야"라는 문장 하나로 나를 지킬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것 만이 옳은 것이었을까?”
내가 이전에 AI를 보고 핸드폰을 던져 버렸던 것은, 기계는 나에게 “이성”만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바라보고 답변을 읽자마자 얼굴이 뻘게지고, 내가 그런 사람일 리 없다고 부정해서 바로 삭제해 버리며 기계 따위가 무엇을 아냐며 화를 냈다만,
그것은 내가 감정을 전부 제외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달라는 나의 요구 때문이었다.
아무리 감정을 빼라고 얘기한다고 해도, 상담사에게 상담하였으면 인간이기에 이렇게까지 감정을 빼고 내가 이를 부정하도록 말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AI는 기계이다.
사람과는 다르게 애초에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이다. 기계는 감정을 전부 빼고 얘기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에겐 감정과 이성이 있어 그 둘은 떼려고 하여도 뗄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나는 “이성적”으로만 말하고 있다 생각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감정”이란 것이 섞이는 건 불가항력이구나 생각했다.
감정이란 것은 “기계”는 가질 수 없는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맞다. 정말로 “이성적”이기만 한 것은 사람일 수 없다. 오로지 “이성적” 일 수 있는 것은 AI나, 감정이 없는 것들만의 것이구나. 이것을 느끼고 나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감정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F 같다 하는 것도, 사실 그게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T들도 언제나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감정적이라고 하는 것이 나를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본디 사람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편견 없이 바라보았고,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왜, 감정적이라는 말을 싫어하게 된 것일까?
나는 여태까지 소위 말하는 대문자 T인 줄 알고 살았다.
모르고 살았다 기보단 외면하고 살았던 것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알 수 있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릴 때 남이 먹던 음식을 먹는 것이 싫었다. 또 같은 찌개를 같이 나눠 먹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것들이 “싫다”라고 했다.
왜 인지 모르게 어릴 때부터 같이 나눠 먹는 것이 불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넌, 애가 왜 이렇게 유별나니?”
사실, 어른들이 나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진 않았다. 그저 “유별나다”고만하고, 내 의견은 묵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른들이 여름에 초코 파이 한 개를 주곤, 언니와 둘이 나눠먹으라고 했었다.
언니가 먼저 한입 깨물고는 나에게 초코파이를 건넸다..
“너도 먹어~”
나는 사실 그것이 싫었다.
남의 타액이 묻은 음식 자체는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켰었다. 나는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왜냐고 묻자,
“나는 원래 같은 음식을 나눠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언니는 말했다
“너 이런 것 가지고 유난 떨면 사람들이 안 좋아해~”
그 말을 들은 나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저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일 뿐이고, 그저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뿐인데 어째서인지 그 말들은 나를 부정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내가 ‘감정적’으로 굴 때 “왜 이것 가지고 난리냐”,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힘들어하네”라는 말을 하고, 친구들도 나보고 “유난 떤다”라는 말을 했으니 결국 힘들었던 나는 “학교 다니기 힘들다.”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애들은 다 잘 다니는데 넌 좀 유별나다~”
그 말이 어린 나에게는 비수처럼 꽂혀왔다. 나는 내 주변 그 누구에게도 내가 있던 감정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받지 못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나의 있는 그대로 솔직한 모습을 내비칠 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너 되게 특이하다” “유별나다” “그렇게 하면 사회생활 못한다” “너는 잘못됐어”
결국 내가 감정을 말할 때마다, 내 존재는 부정되어갔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쌓이고 쌓여, 감정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 “나약한 것” “힘들어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참아내니 나에게 착하다, 장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건 나의 감정 억압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이성적”으로만 굴 때 “강하다”라고 했다.
내가 감정에 빠져 무언가 “힘들다”라고 하는 말에는 “남들도 다 하는데 넌 왜 못해!”라는 말로 돌아왔다.
내가 묵묵히 무언가를 할 때는 “잘한다”라며 칭찬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것이 감정을 참고, 참고, 참아서 하게 되는 것들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였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옳은 것이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불안했던 내 마음속에서, “잘한다” “성숙하다” “강하다”라는 말들이 나에게 조그마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착각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나의 감정들이 칭찬 속에서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행동들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어른스럽게 구는 것”, “감정을 말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감정을 “억눌렀다”라고 생각하기보다, 감정을 “강하다는 평판”과 바꿔 먹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고 나는 "강하다"라는 평판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유약하다” “소심하다” “유별나다”등 부정적인 평가에서 “쟤는 놔두면 알아서 다 잘한다” “강하다” “혼자서도 씩씩하다”로 바뀌면서 나는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다 학년이 올라가며 머리가 크고 느끼는 것이 있었다. 친구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말했다.
“너 그렇게 조금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하면 나중에 커서 일은 어떻게 할래?”
“그건 별로 힘든 일도 아니잖아, 다들 하는데 너도 그냥 해~”
나는 어릴 때의 나에게 하던 어른들의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참는 것이 옳고, 표현을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진실이고 옳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남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속에서 미친듯한 불편한 기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나의 마음을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싫은 게 싫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는 것이 내가 믿어왔던 무언가가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속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들을 보고 떠올랐던 건 ‘싫음’보다 ‘미움’에 가까웠다.
나는 그들이 미웠던 것 같다. 저렇게 감정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인지 그것이 굉장히 싫고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다. “나는 힘들었어..” “내 감정은 이랬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것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뭘 저런 걸 가지고 징징대? 진짜 한심하다”
하지만 그 마음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혐오”가 아니, “질투”였다.
나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언제나 강한 사람이어야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이성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감정적인 사람을 싫어했던 게 아니라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용기가 지독하게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살아 남고 미움받지 않을 수 있었던 그들이 사무치게 미웠다. 나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내가 차가운 척, 이성적인 척했던 건 그렇게 해야 나에게 “멋있다” “잘한다”라고 인정을 해줬기 때문이고, 결국 그것은 내 감정을 깊고 깊은 내 마음속 심해에 던져서 꽁꽁 묶어두어,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만들었다.
감정은 나에게 언제나 컨트롤 불가능한 아니,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꽁꽁 묶어둔,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자물쇠로 단단하게 채워둔 무언가였다.
나는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남이 감정을 토로할 때마다 감정을 밀어내고, 조롱하고, 깎아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쟤는 약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나 자신이 그만큼 약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들을 싫어한 게 아니다.
차라리, 오히려 부러웠다.
그렇다. 사실 그것은 결국 한심하다는 평가도 아니며, 질투도 아니며, 결국 그것의 근본은 ‘부러움’에서 나왔던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용기 따위,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 무언가였기에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것을 마주하니 여태까지 내가 왜 그렇게까지 감정적임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싫어했던 그들의 모습은, 결국 어린 나의 모습을 싫어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과 어린 날의 모습을 정교하게 투사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하고 있었다고? 그렇게까지 나약해 보였던 그들이 결국 나약한 나 자신이 싫은 마음에서 기인한 일이라는 것은 내 모든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정말, 인정하기 싫었다.
그냥 그들이 그냥 한심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싶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니까. 여태까지 나는 성실하고, 일을 잘하며, 자기 할 일을 불만 없이 척척하는 멋진 사람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그런 추한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징징대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내 감정은 타당했다는 말이다.
..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성”으로 생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패배했다. 그들이 정말 재수 없고 미웠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그들이 당당하게 “싫다” “힘들다”라고 외치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건 결국, 내 안의 어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정말로 괜찮아진 줄 알았다. 어린 나는 그 어디에도 없고, 지금 현재의 나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는 내가 내 손으로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걔는 존재해선 안 됐다. 존재한다면, 나의 현재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애니까. 걔는 없어야만 했다.
나는 그 아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 아이는 울고 떼쓰며 들어가기 싫다고 했지만, 너는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그 아이는 체념한 듯, 이내 소리를 멈췄다.
결국 그 아이는 내가 깊은 바닷속, 아니 그보다 더한 심해 속 어둠 끝자락까지 처넣어 상자에 가뒀다. 자물쇠를 단단하게 잠가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가둬버렸던 그 애는, 죽지 않고 그 안에서 소리치며 울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아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여 버린 줄 알았던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물살 때문에 살이 찢겨 쓸리고 다쳤는데도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깜깜한 어둠 속 자물쇠를 풀고 쇠사슬을 풀어주며, 결국 그 아이를 상자에서 꺼내 주었다. 너무나도 작은 상자 안에 외롭게 홀로 웅크리고 있던 아이를 보니, 내 마음을 으스러뜨리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울음을 멈추며 이제 나를 보러 왔다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작고 나약했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 그 자체였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많이 아파 보였다. 이렇게 견뎌온 이 아이는, 이렇게 심해에서 혼자 가둬진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제야 나는 알았다.
그 아이가 나를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지를.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그저 내가 와주기 만을 바라며
“난 괜찮아, 나중에 와도 돼, 지금 아니어도 돼”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버텨왔다는걸.
그 아이는 상처투성이인 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고 그 아이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따뜻한 빛이 나에게 스며들어 오며, 여태까지의 아픔이 다 나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곤 그 아이가 나에게 속삭여주었다.
“지금이라도 와줘서 고마워 널 언제나 기다렸어.”
그 아이는 나에게로 돌아와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 영영 들어와서, 따뜻한 온기로 맞아주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뺨에 흘렀다. 내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닌 것 같았다. 내 볼 아래로 따뜻한 물줄기가 느껴졌다. 그 아이가 나를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 같았다.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기쁨 아니, 사랑, 아니 그보다도 더한 무언가였다. 여태까지 외롭고 쓸쓸하게 기다려준 그 아이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버텨줘서 고마웠다고, 너는 나약하고, 제멋대로인,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 온전한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내 안에서 자라, 나와 같은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온전히 자라 지금 나의 모습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 아이와 함께라면 나는 곧.. 언젠가 괜찮아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언제나 나를 갉아먹던 누군가를 향한 질투, 부러움이 이제는 그저 나로서 존재함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약한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감겨왔다. 평온한 기분이었다.
이후 나는 더 이상 감정형인 사람들이, 특히 내가 그토록 싫다고 믿어왔던 INFP도, 더 이상 밉지 않았다.
내가 그들이 싫었던 이유는 사실 내가 그들을 가장 부러워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그들은 나를 나약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고맙게도 느껴졌다.
생각보다 그들은 용감했다. 나약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고 어쩌면, 멋진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감정을 드러낸 다는 것은 용기 그 자체였다. 그들은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지어 상처를 받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나의 “마음” 또 “진실”을 말한다. 과거의 나처럼, 그들을 “나약하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반문하듯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정말 진실로 들어가는 “용감함”이다.
이후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면서, 공감을 하기도 하였고, 뭐 저런 것을 보고 싫어하나 싶었다. 그 모습이 공감이 될 때도, 바보 같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모습을 봐도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의 “어떤” 모습이 싫어서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어찌 보면 연민이 들기도 하였고,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제서야 나는 내면 아이를 찾았지만, 아직 찾지 못해 가라앉은 내면 아이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인을 증오하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형태의 결정체이다.
당신들은 타인을 통해 비친 거울에서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가? 당신의 어떤 모습이 그토록 당신을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들여다보라.
당신이 죽여버렸던, 내면 아이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과 당신이 어딘가에 묻어둔 아이는 본래 하나이다. 당신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온전한 빛을 보면 완전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거기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가둬 놓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