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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Nov 24. 2022

어떻게 죽을 것인가



투명하지 않은 앞날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죽음을 더듬어 보기에 너무 이르다면 그건 모르는 소리. 복지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지하철을 타는데,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반반이나 섞여 있는 광경을 보니  괜스레 젊은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노인들은 많고 출생은 저조하니 '이 젊은이들이 어깨가 버겁다고 느낄 때가 곧 올 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파르르 떨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노인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답답하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시대로 쑥쑥 들어가는 첫 번째 길목에 있는 것 같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지 않아도 집 앞에 몇 걸음만 나가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나라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나이든 사람들이 아무리 경험이 많다 해도 빛나는 아이디어는 젊은 머리가 아니면 안 되는데, 이 나라의 미래는 어쩌나. 이 작은 땅에서 못된 것들만 콕콕 집어 세계 1위를 하는 나라. 저출생으로, 고령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라. 나라를 걱정하는 것처럼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모욕하고 삿대질하는 두 얼굴의 정치인들. 주변 국가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아프기는커녕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힘없는 나라. 자살도 세계 1위라는 아주 아주 작은 나라. 아무리 노력해도 내 집을 마련하기 힘든 나라. 결국 결혼을 포기하게 만드는 나라. 빈부 격차가 심한 나머지 희망 없는 미래를 항해하며 방황하게 될 젊은 청춘들이 힘들게 걷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복지가 좋아졌노라 떠들어도, 정작 실상은 외로움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눈물이 떨고 있는 반면 자식이 있고 재산도 많은데 노령 연금을 타는 노인들이 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을 서로 묵인해주며 세금을 개인의 돈처럼 쓰는 몰상식한 일부 공무원들이 있다. 부모도 자식도 각자 사는 것을 원하는 문화는 좋지만 사회는 이기주의의 극치를 달리다 못해 이웃의 홀로 살던 노인이 죽어도 며칠 혹은 한 달이 넘어서야 발견되는 무관심이 있다. 


노노케어가 있다는데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단어다. 언제부터 존재하고 있었는지 나만 몰랐나? 했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일이라는데. 노인 일자리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보려는 정부의 노력이 가상하지만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니 노인들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런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결혼하고도 아이는 꿈도 꾸지 못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어른들의 속 앓이.


우선은 나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깨끗하게 늙으라고. 욕심쟁이같이 움켜쥐다 썩혀서 버리지 말고 마음을 햇볕에 말려 어디든 흘려보내라고. 정신을 가다듬어 몸도 마음도 그리고 의복도 언제나 깨끗이 세탁해 입으라고. 잠자기 전에 꼭 속옷 갈아입는 거 잊지 말라고.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어떻게 죽을까? 죽음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두려움이 큰 것 같다. 대다수 노인들은 "잠자리에 누워 아침에 눈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 죽음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아픔을 안겨주는 일인지는 몰라도 본인들에겐 복이라고 입 모아 말한다. 그러려면 욕심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매일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하자. 살면서 욕심을 채우려고 많이 아파했으니까.


친구들과 대화에 집중하다보면 분위기에 휩쓸려 말을 걸러내지 않고 하게 되는데, “나는 75세까지만 살란다. 조금은 아쉬울 때 죽어야지.”라고 까불었다. 지금은 70이 청년이라니, 말을 함부로 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50대에는 죽음을 말할 때면 죽음이 스르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에 '죽음'이라는 단어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싫었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말하는 나이가 돼버렸으니. 바라는 건 가족들과 웃으면서 작별할 수 있다면 크나큰 복으로 생각된다.

 

사람의 죽음은 이미 정해졌지만 자신이 죽는 날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와 또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은 부모의 마지막 배려가 아닌가 싶다. 억만장자도 죽고, 나라를 주물럭거리던 사람도 죽는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어떤 말일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무슨 계획을 할 수 있지? 다만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감사하며 살아가자. 그렇게 시간 따라 걷다보면 어딘가에 이르겠지. 감히 사랑은 아니더라도 누구를 미워하며 걷지 않기를 바라면서 일단은 최선을 다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는 날 동안은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나는 긍정을 외치며 삶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래서 죽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나이가 이만큼 들었고 많은 것을 배웠어도 여전히 배울게 있다는 것에 새로운 의욕으로 최선을 다하자. 우리세대는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오며 대다수 사람들이 입고 싶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생각조차도 사치라 여기며 열심히 앞만 보고 걸었다.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백세시대라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죽는 날도 알지 못하기에 그동안 모나게 굴어서 상처받았던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나, 달라진 나를 보여 주고 싶다. 마음이 바빠지지 않게 지금부터 하나씩 실천 하도록 하자.


아이들이 “엄마 먹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싶은 거는?”라고 물어올 때면 잠시 생각하다가 “별로 없는데.”로 답하게 된다. 사실 없다. 내가 주장하며 살아오지 않았기에 뭘 먹으면 맛있는지 머뭇거리게 되는 게 당연하다. 나이가 들어 달라진 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도 상대를 탐색할 필요 없다는 거. 같은 입장에 말까지 통하니 비교할 일도 없이 넉넉한 대화를 하게되어 좋다. 그때마다 하루라는 시간을 감사하게 된다.


지인들이 하는 말, “나이 들어가니 집안에서 화초 키우는 것도 버거워 다 정리했어.” 걷는 것도 점점 느려진다. 힘에 부치는거지. 다행히 사람들이 싫어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준 나. 나름대로 혼자 재미있게 놀고 있고, 혼자서도 잘 노는 걸 나는 축복이라 말한다.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을 때 생각이라는 강가에 발을 담그면 발등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맑은 물에 찰랑거리며 몇 시간이 지나도 놀아지는 즐거움은 나만 아는 행복이다.


바람은 내가 죽기 전까지도 생각을 글로 적을 수만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떤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차단된 인생이 아니라는 것과 글을 쓰고 다듬을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있다는 걸 알 때 그것이 행복이었다고 말하는 마지막을 맞고 싶은 거다. 넘어지고 실수하며 걸었으니 이제는 내 맘에 들숨과 날숨을 쉬며 즐겁게 살다가 신께서 부르시면 살아온 날들을 칭송하는 바람이 되고 싶다. 그런고로 모든 일에 서두름 없이 천천히 숨 쉬며 걸어가는 연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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