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연구하던 심리학도는 왜 철학책을 들었는가?

평생 누군가의 복제품으로 늙어갈 것인가, 자기 삶의 원본이 될 것인가

by Heesoo Jung

범죄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종종 너무 손쉽고 낡은 상상을 꺼내 든다. 잔혹한 범죄, 기괴한 일탈, 사이코패스의 심연 같은 것들에 매료되어 그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대개 길게 해명하지 않는다. 그저 아니라고,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내가 범죄심리학과 수사심리학을 공부한 이유는 훨씬 단순했고, 훨씬 건조했다. 그것은 자극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내가 뉴욕의 존 제이에서 범죄심리학을 공부하고, 이후 영국 허더즈필드 대학교에서 수사심리학을 더 깊이 파고든 이유는 결국 이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나는 범죄를 낭만화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범죄라는 현상을 가능한 한 차갑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사회의 선을 넘는 순간, 그 배후에는 어떤 인지적 패턴이 작동하는지, 어떤 환경이 그 선택을 떠밀었는지, 어떤 성향과 경험이 겹쳐졌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범죄자의 얼굴보다 범죄가 발생하는 조건에 더 관심이 있었다. 비정상적인 개인의 괴상한 본성이 아닌, 인간이 어째서 어떤 순간에는 너무 쉽게 금지선을 건너는지, 그 일탈의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할수록 내 결론은 의외로 허무한 곳으로 향했다. 나는 수많은 범죄자의 인지 구조, 성장 환경, 충동 조절의 문제, 공감 능력의 편차, 사회적 맥락과 관계의 상처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거대한 공식 같은 것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설명해 줄 단 하나의 열쇠도 없었다. 범죄는 생각보다 덜 극적이었고, 무엇보다 훨씬 더 개별적이었다. 결국 많은 경우 답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았다.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개별적인 결핍과 우연, 환경과 선택, 왜곡된 해석과 미세한 계기들이 뒤엉켜 만들어낸 파편적 결과일 뿐이었다. 그 결론은 학문적으로는 정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조금 공허했다. 하나의 원리로 붙잡을 수는 없다는 사실만 설명가능한 문제로 남았다.


박사 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와 잠시 사회생활을 했을 때였다. 정책과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장, 조직과 제도, 행정과 성과의 언어가 일상을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인간 군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잘 이해했으며, 법을 잘 지키고,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정해진 절차를 따르며, 자신의 삶을 시스템의 질서에 맞게 아름답게 정렬시키는 사람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들이었고, 모범적인 시민들이었다. 그들의 이력은 매끄러웠고, 선택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삶은 소셜 미디어에 진열하기에도 흠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풍경 앞에서 감탄보다 질식을 먼저 느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정확히 언어화하지 못했다. 분명 이들은 사회가 말하는 성공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책임을 다했으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어떤 공백을 보았다. 그들의 삶에는 노력이 있었지만 질문이 없었다. 성실함은 있었지만 일상에 대한 고유한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는 사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너무 자주 비어 있었다.


내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처음에는 나조차 그 감각의 정체를 분명히 붙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수록, 그 사소한 장면들이 하나의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엮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사람만의 고유한 데이터를 듣는 일을 유난히 좋아했다. 다른 지식은 검색만 하면 나오지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사람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겉으로 비슷해 보이는 삶들 사이에서도, 한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사유의 결론만큼은 끝내 복제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복제되지 않는 부분에 늘 끌렸다.


예를 들어 함께 커피를 마실 때도, 누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맛있다'고 말하면, 내게는 그 말 다음이 더 중요했다. 무엇이 맛있다는 것일까. 산미가 좋아서일까, 묵직한 바디감이 좋아서일까, 혀끝에 남는 쌉쌀함 때문일까, 아니면 입 안에서 오래 감도는 향의 결이 좋아서일까. 누군가는 살짝 탄 듯한 향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맑고 가벼운 산뜻함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단맛이 은근하게 올라오는 순간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첫 향보다 끝맛의 정직함을 더 높이 산다. 같은 한 잔을 마셔도 사람마다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은 이렇게 다르다. 나는 그 미세한 차이를 듣는 일이 좋았다. 그 사람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그런 사소한 취향의 문장 속에서 문득 선명해진다고 느껴왔다.


전시를 보고 나와서도 비슷했다. 누군가 '좋았다'고 말하면, 나는 무엇이 좋았는지가 궁금했다. 작품의 색감이었는지, 공간의 동선이었는지, 작가가 던진 질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한 장면이 자기 과거의 감정과 이상하리만큼 정확히 맞닿았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서사가 좋았는지, 배우의 표정이 좋았는지, 대사가 좋았는지, 혹은 영화가 끝난 뒤 남겨진 침묵이 좋았는지. 나는 언제나 그 뒤의 문장을 듣고 싶었다. 평가보다 근거를, 감상보다 해석을, 취향보다 그 취향을 낳은 사람의 구조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의외로 자주 멈칫하게 되었다. 이런 질문에 선명하게 답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피가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했다. 전시를 보고 와도 '재밌었다' 혹은 '별로였다'에서 종결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를 본 뒤에도 무엇이 좋았는지, 무엇이 지루했는지, 어느 장면이 자기 안의 어떤 감각을 건드렸는지까지 또렷하게 풀어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좋고 싫음은 있었지만, 그 좋고 싫음의 근거는 자주 비어 있었다. 감정은 있었지만 언어가 없었다. 반응은 있었지만 성찰은 짧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언제나 자기 감상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피곤한 날이 있고, 굳이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다. 나 역시 모든 대화가 철학적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 공백이 단순한 말버릇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취향에 대한 설명이 비어 있는 사람들은, 삶의 더 중요한 선택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 그 전공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취업이 잘 되니까 했다고 했다. 왜 그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으면 성적에 맞춰 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왜 그 직장에 들어갔느냐고 물으면, 내 스펙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자리라서 들어갔다고 했다. 왜 그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 앞에서도, 대답은 대개 사회가 이미 승인한 문장들의 반복에 가까웠다. 공부하라니까 공부했고, 남들이 좋다는 길이라 선택했고, 무난하고 안전한 길을 붙잡았고, 그 결과를 자기 선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생존의 논리도 있었고, 경쟁 사회의 압박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안정성을 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는 마음을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 선택들 대부분은 너무도 이해 가능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답답했다. 그 선택들의 중심에 정작 그 사람 자신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한 인간의 기준은 선명했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삶을 원하고 무엇에서 깊은 기쁨을 느끼는지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순간의 쾌락이나 안도감은 있었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단단한 감각은 희미해 보였다. 안정은 있었지만 이유는 없었고, 성취는 있었지만 방향은 불분명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더 분명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단지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해석하는 언어 자체를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싫은지,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무엇 앞에서 끝내 물러서고 싶지 않은지. 그런 질문에 스스로 답해본 적 없는 채, 사회가 쥐여준 정답을 자기 욕망으로 오해한 채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내게는 범죄자의 일탈만큼이나 낯설고 기이하게 보였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더 기이했다. 범죄자의 일탈은 적어도 규범을 깨는 일이다. 거기에는 비뚤어진 방식으로든 자기 판단이 개입한다. 물론 그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선을 넘는 자는 최소한 선을 의식한다. 그러나 사회가 제시한 정답을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삶에는 또 다른 종류의 비극이 있었다. 그것은 일탈의 비극이 아니라 순응의 비극이었다. 시스템이 정해준 객관식 보기 안에서 부지런히 답을 고르고, 그 답이 자기 삶의 본질인 양 믿는 사람들. 타인의 욕망을 정교하게 복사해 자신의 욕망인 양 붙여 넣고, 남이 설계해 둔 삶을 자기만의 성공 서사처럼 포장하는 사람들. 나는 그 풍경이 범죄보다 더 거대하고, 더 조용하며, 더 집요한 사회적 질병처럼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아직 그것을 ‘고유성의 결여’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지금처럼 정리된 개념도 없었다. 다만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회가 사유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 익숙한 정답을 의심하는 용기, 남의 욕망과 내 욕망을 구분하는 감각, 내 선택의 이유를 끝까지 묻고 또 묻는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비는 단순히 개인 몇 명의 습관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현상이라는 것. 사회 전체가 질문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점점 더 효율적으로 살 수는 있어도 끝내 왜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게 된다. 성과는 높아질지 몰라도 존재는 희미해진다.


나는 점점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내가 내 삶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결국 내 삶은 남이 만들어 둔 기준 위에서만 굴러가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똑똑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 선택의 이유를 내가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일이고, 내 삶을 내가 꾸려간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이며, 내가 무엇을 잃으면 무너지고 무엇을 지키면 살아 있는지를 분별하게 되는 일이다. 생각은 장식이 아니라 기준이다. 사유는 취미가 아니라 삶을 떠받치는 뼈대다.


하지만 나는 심리학 전공자였다.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인지, 정서와 관계를 정교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분명 강력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어느 순간 그보다 더 밑바닥의 질문이 필요해졌다. 생각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인간은 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가.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왜 타인의 기준을 쉽게 내면화하는가. 무엇이 한 인간을 그토록 순응적으로 만들고, 또 무엇이 어떤 인간에게는 끝내 질문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가. 나는 인간의 본질과 사유의 근원,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가장 오래된 질문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 불리는 철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계획을 뒤로하고 뉴질랜드 더니든, 오타고의 고립된 언덕으로 향한 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연에 가까웠다. 바람이 맑고, 시간이 길고, 침묵이 쉽게 침투하는 그곳에서 나는 철학을 붙들고 인간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이유를 상실하는지, 사회의 언어가 어떻게 개인의 욕망을 잠식하는지, 무엇이 한 사람을 다시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철학은 내게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굳어버린 생각을 다시 흔들고, 마비된 질문의 감각을 되살리는 훈련이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정말 내 것인지,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이 가능한지,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되묻는 작업. 철학은 나를 세상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더 정확하게 보게 만들었다.


그 시간은 내게 일종의 재활이었다. 사회가 던져주는 익숙한 언어를 즉시 받아쓰는 대신, 단어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의심하는 습관을 다시 배우는 시간. 내가 원하는 삶이 실은 남이 보기 좋은 삶은 아닌지, 내가 옳다고 믿는 기준이 사실은 시대가 유행처럼 주입한 표준은 아닌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내 안에서 올라온 것인지 다시 묻는 시간. 그 질문들은 때로 사람을 느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진실하게 만든다. 나는 그곳에서 삶은 속도로 평가될 수 있어도 방향은 대신 정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이후 뉴욕대에서 실험인문학과 사회참여를 연구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철학적 사유를 현실의 대지 위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질문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다시 묻고, 자기 언어를 찾아가고, 복제된 삶이 아니라 원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와 장치가 필요하다. 사유는 개인의 내면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대화의 형식이 될 수 있어야 하며, 공동체의 문화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유를 삶의 기술로, 교육의 구조로, 공동체의 실험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해석하도록 돕는 시스템,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문화,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공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 긴 궤적 끝에 내 나라로 돌아왔다. 사유하는 사람들의 매거진, 월간 컨템플레이티브에서 확장하여 컨템플레이티브 주식회사를 세웠다. Thanks to 팀 컨템플레이티브.


돌아보면 그 길은 얼핏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범죄심리학, 수사심리학, 철학, 실험인문학과 사회참여. 그러나 내 안에서는 이 모든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나는 처음부터 늘 인간이 왜 자기 삶을 그렇게 선택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만 처음에는 그 답이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서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알게 되었다. 더 거대한 문제는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들, 너무도 성실하게 사회의 스크립트를 수행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범죄자의 프로파일보다,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무사유가 훨씬 더 넓고 깊은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는 것을.


그래서 과거의 내가 한 명의 범죄자를 이해하려 했던 심리학도였다면, 지금의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인간의 가치를 복제하는 고유성 결여 사회를 해부하는 소셜 프로파일러에 더 가까워졌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겉모습이 아니다. 이 사회가 개인의 욕망을 어떻게 길들이는지,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이유보다 타인의 기준을 먼저 내면화하는지, 무엇이 한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잃어버린 원형을 다시 찾도록 돕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구조를 먼저 보는 사람이다. 표면적인 위로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더 신뢰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고유성을 잃었을 때 얼마나 쉽게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하는지, 그리고 자기 고유성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놀랍도록 단단해지는지를 믿는다. 내가 복무하고 싶은 대상은 감상이 아니라 본질이다. 맹목적인 순응이 훼손한 인간의 원형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그것이 내가 결국 하게 된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일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생각 없는 시스템 속에서도 가끔 아주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존재들이 포착된다. 모두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속도를 맞추고 있을 때, 기꺼이 스스로 전원을 끄고 걸어 내려오는 사람들. 남의 피드를 곁눈질하는 대신, 자기 내면의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들. 세상이 정답이라 부르는 문장을 복사하지 않고, 비록 서툴고 투박하더라도 자신만의 주관식 답안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 타인의 기대라는 감옥에서 조용히 탈옥한 사람들.


나는 그들을 컨템플레이터, 사유하는 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화려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쉽게 소비되는 매력이나 얄팍한 자기 연출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이들의 매력은 생각의 밀도에서 나온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성급히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남이 원하는 것을 자기 욕망으로 착각하지 않는 사람. 편리한 확신 대신 불편한 질문을 견디는 사람.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이유로 삶을 써 내려가는 사람. 내게 그런 사람들은 어떤 치장보다 지적이고, 어떤 권위보다 아름답다.


컨템플레이티브가 하고 싶은 일은 결국 분명하다. 이 사회의 소음 속에서 사유의 감각을 되살리는 것. 사람이 자기 삶의 이유를 다시 묻도록 돕는 것. 복제품처럼 안전하게 사는 법이 아니라, 원본으로서 불안하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함께 연습하는 것. 단지 '나다움'을 소비 가능한 슬로건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다움조차 너무 쉽게 브랜딩되는 시대에, 나는 더 깊은 질문을 붙들고 싶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삶을 사는가. 나는 무엇에 기꺼이 시간을 바치고, 무엇 앞에서 끝내 물러서지 않을 것인가.


어쩌면 삶은 결국 이 질문들에 대한 긴 주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주석을 남의 문장에서 베껴 쓰는 대신, 자기 문장으로 써 내려갈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얼굴이 생긴다. 나는 그 얼굴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생각의 근육이 되살아난 사람들, 자기 이유를 가진 사람들, 조용하지만 단단한 원본들. 내가 만들고 싶은 공간과 작업은 그들을 위한 기록이자, 아직 스스로의 언어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당신도 다시 질문할 수 있다고. 너무 오래 남의 정답 속에 살아왔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자기 삶의 문장을 다시 쓸 수 있다고.


평생 누군가의 복제품으로 안전하게 늙어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으로, 끝내 자기 삶의 원본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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