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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한 저출생

건대교지 128호 (2025.봄)

by 정호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같은 나라는 없었다.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일구어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람들은 ‘피크아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피크아웃이란 ‘정점을 찍고 하락 기미를 보이는 국면’을 일컫는 증권가 용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서 정점을 찍었고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러한 ‘피크아웃 코리아론’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가 바로 저출생이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명이다. 합계출산율은 가임기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한다. 한 국가의 인구를 100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합계출산율이 0.7명이라면 이들의 자녀는 총 35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손자녀는 24명으로 줄어든다. 숫자만 놓고 봤을 때 단 두 세대 만에 공동체가 소멸하는 수준으로 인구가 감소한다. 대한민국의 평균 인구를 5,100만 명으로 가정하고 합계출산율 0.7명 수준을 유지한다면 100년 후 우리나라 총인구는 현재의 20% 미만으로 급감한다.



물론 오늘날 저출생은 선진국에서 대부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합계출산율이 1명대 이하로 급격히 감소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 같은 급격한 인구 감소는 필연적으로 대한민국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각종 제도는 약 5천만 명의 인구수와 적정한 경제성장이 뒷받침한다는 전제 위에 설계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인구가 감소한다면 현재 군 징병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일하고 세금을 내면서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초저출생은 그 자체로 사회 시스템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중대한 위기 신호로 평가돼야 한다.



저출산? 저출생? : 저출산과 저출생은 동일한 현상을 다르게 표현한다. 저출산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라는 맥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저출생은 ‘아이가 세상에 나오다’라는 맥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통계적 관점에서는 저출산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고, 인구 감소에 관한 환경적 요인을 설명할 때는 저출생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그러므로 해당 글은 저출생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되, 통계 지표를 인용함에 있어 출산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생애사 전략: 저출생을 선택하다


그렇다면 저출생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학자들은 ‘생애사 전략’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 개체의 생애를 설명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변이가 있고 그 가운데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적응을 위해서 개체는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고려하며 언제 번식하면 좋을지, 언제까지 살면 좋을지 등의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이를 생애사 전략이라고 한다.


생애사 전략에 따르면 종의 적응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개체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환경이면, 출산을 지연하는 느린 생애사 전략을 택하게 된다. 또한 인구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 자손을 많이 낳는 선택은 비효율적이다.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선 자손이 번영할 확률이 낮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는 전략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2006년 인구학자 볼프강 루츠가 14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들은 합계출산율이 낮았다. 2017년 진화심리학자 올리버 승의 연구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의 국민일수록 느린 생애사 전략을 채택하는 경향이 발견됐다. 결과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출산율은 낮아진다. 높은 경쟁압력은 저출생을 초래한다.



대한민국 사회 구조가 높은 경쟁압력을 만든다


높은 경쟁압력이 저출생을 초래한다는 명제는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다음 그래프는 인구 밀도와 출산율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결과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청년층의 경쟁압력 체감도가 높았고, 이에 따라 합계출산율도 낮게 나타났다.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아이가 덜 태어난다. 서울은 가장 젊은 도시이지만 동시에 아이가 가장 적게 태어나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구 밀도와 출산율 사이의 관계는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환경과 연결된다.



경남대 사회학과 양승훈 교수는 ‘구상-실행 기능의 분리’라는 개념을 통해 수도권 집중 현상을 설명한다. 산업화 시절 노동 집약적 제조업이 중시되던 때에는 현장 노동자가 생산성을 높이고 품질을 향상시키는 숙련 과정이 중요했다. 생산직 노동자(실행)와 엔지니어(구상)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러나 90년대부터 ICT 산업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생산직 노동자들보다 고학력 엔지니어들의 연구개발 및 설계 비중이 중요해졌다. 기업 연구소들은 고학력 인재가 선호하고 밀집해 있는 수도권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실행 기능을 담당하는 생산기지조차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산업·일자리 구조의 변화는 지방 인구 유출과 수도권 집중화를 가속시켰다.



구상-실행 기능의 분리는 수출 제조업 산업에 관한 설명이지만, 서비스업이나 문화 예술 분야의 경우 수도권 집중 정도가 훨씬 큰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갈 수밖에 없고, 기업들은 청년층이 몰리는 수도권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순환 구조에 묶이게 됐다. 2024년 1월 부산상공회의소가 매출 기준 상위 1,000대 기업의 지역 분포를 분석한 결과, 10년 동안 수도권에 위치한 1,000대 기업 숫자는 43개 증가했다. 그러는 사이 부산에 소재한 1,000대 기업 숫자는 38개에서 28개로 10개가 줄었다. 부산 입장에서는 지역 대표 기업이 1/4 가량 사라진 것이다. 2025년 기준 대기업 계열사의 약 70%, 상위 30대 대기업 본사의 90%가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수도권 집중 현상이 집중되면서 등장한 은어가 ‘판교-기흥 한계선’이다. 청년들이 사무직의 경우 판교 이남으로, 생산직의 경우 기흥 이남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을 일컫는 용어다. 이렇게 수도권에 인구가 몰릴수록 서울권을 중심으로 한 주택 가격은 상승하고 경쟁 압력은 높아진다. 그 결과 청년들은 ‘지방에는 먹이(일자리)가 없고, 수도권에는 둥지(주거)가 없는 이중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 ‘노동시장 이중구조(이하 노동 이중구조)’가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취업이라는 관문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 이중구조는 한 나라의 노동시장이 원청,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1차 내부 노동시장과 하청, 중소기업,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2차 외부 노동시장으로 분절된 상황을 의미한다. 두 부문 간 직업 이동성이 약하고, 동일 노동 행위에 대해 다른 임금 보상이 이뤄질 때 노동 이중구조가 견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의 노동 이중구조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화가 본격화된 90년대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성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기업 단위를 넘어선 산업별 교섭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이후 비정규직이 대거 양산되는 가운데 비용 절감을 위한 원하청 구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21세기에 이르러 노동 이중구조는 굳혀졌다. 2023년 11월 한국은행 「경제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 대비 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2004년 1.5배 수준에서 2023년 1.9배로 확대되었다. 노동자가 1차 노동시장에서 2차 노동시장으로 이동한 경우는 갈수록 드물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들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1차 내부 노동시장에 입성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성장으로 인해 좋은 일자리의 총량이 줄어들면서 취업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취업이 늦어지고 자기 커리어에 대한 집중이 강해지면서 생애주기상 출산은 지연된다. 여성의 경우 출산이 가져올 커리어에 대한 부담으로 출산을 더욱 꺼리게 된다. 한국 사회의 경우 대부분 출산이 결혼을 통해 이뤄진다1). 그런데 일자리 격차는 혼인 격차로도 이어진다. 2022년 9월 한국은행-한국갤럽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장래에 결혼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취업자(49.4%)가 비취업자(38.4%)보다 높았다. 취업을 했더라도 비정규직의 경우 결혼 의향이 있는 비율이 비취업자보다도 더 낮게 나타났다(36.6%). 2020년 한국노동패널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30대 남성의 경우 소득이 낮을수록 미혼율이 높아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렇게 ‘상위권 대학+수도권+1차 내부 노동시장’에 입성해야만 하는 한국 사회를 2022년 OECD 보고서는 ‘황금티켓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생산성 격차, 노동시장의 이원화, 교육 시스템의 취약성에 직면한 청년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공공 부문이나 대기업에서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러한 한국의 ‘황금 티켓 증후군’은 청년 고용률과 가족 형성 비율을 낮추고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리며, 장기적 상흔 효과를 발생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_ 2022 OECD 『OECD Economic Survey Korea』


황금티켓 증후군은 한국 사회 특유의 경쟁 문화와 연결된다. 사회비평가 한윤형 작가는 한국 사회가 높은 표준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2) 평균과 표준은 다르다. 상위권 대학과 대기업 정규직은 한국 사회에서 다수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평균은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제한된 표준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한 중산층의 기준이 됐다.


2) 표준압이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적어도 표준 혹은 표준 이상이 되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한윤형, 『상식의 독재』, 생각의힘, 2024, pp.240-241)


이렇게 제한된 표준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한국적 능력주의’가 강조된다. 한국에서의 능력주의 담론은 ‘한 사람의 역량에 대한 평가에 기반해 자원 배분 및 보상을 결정한다’라는 본래 의미보다는 ‘특정한 시험·경쟁을 통과한 사람에게 지위를 부여한다’라는 맥락에 가깝다. 불확실한 한국 사회에서 예측 가능성과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이 바로 시험이다. 성적이야말로 모두에게 납득할 만한 결과를 제공하며 기계적으로 공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국적 능력주의는 모든 불균형이 성적에 선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균형을 개인의 노력 문제로 환원시키게 된다. ‘경쟁에서 승리했으니 보상받아야 한다’라는 관념은 ‘선발 이후의 불평등·비경쟁성’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경쟁압력이 높은 환경에서 청년들이 출산을 지연하거나 포기하는 선택은 이상하지 않다. 생애주기 전략의 틀에서 봤을 때, 현재 저출생은 청년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한 과정이자 결과이다. 그래서 저출생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개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모여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또한 청년들의 출산 포기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요인은 그 자체로 해결되어야 할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들이다.



선진국 그리고 헬조선: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선진국 그리고 헬조선 :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2015년은 대한민국이 초저출생 사회에 본격 진입한 해로 평가 받는다. 2015년 이전에도 이미 한국 사회는 저출생 국가로 진입한 상태였으나, 그 수준은 이탈리아 등 여타 출산율 하위권 국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2015년부터 합계출산율이 0명대 이하로 떨어지며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 가지 지표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수도권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둘째, 청년 인구의 수도권 유입이 가속화됐다. 2015년 이전까지는 젊은 층이 20대에 대학이나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유입되다가 30대가 되면 지방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흐름이 약화됐다. 셋째, SNS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헬조선 담론이 유행했다. 2015년 당시에는 ‘노오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나라’, ‘헬조선은 탈출이 답’과 같은 말이 SNS 커뮤니티를 뒤덮었다. 한국 청년층 사이에서 인스타그램 이용자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젠더 갈등이 주요 이슈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헬조선 담론이 유행하는 와중에도 대한민국은 나름대로 잘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2020년대에 이르러서 국제적 지표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헬조선보다는 ‘국뽕’이란 단어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놀라운 지지를 받았다. 전 세계는 팬데믹 성과를 보인 한국 시스템에 박수를 보냈고, 2021년 한국은 명목 GDP 기준 전 세계 경제 규모 10위 국가로 성장했다. 2022년 5월, 유엔 통계국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분류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어찌 보면 선진국과 헬조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우리나라가 방역 선진국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공 시스템의 축적된 역량과 더불어, 당시 의료진·공무원·소상공인이 희생을 치르면서 시민들이 성실히 협조한 결과 덕분이다. 대한민국은 인적 자본의 힘으로 성장한 나라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를 달성하고, 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환경에 재빨리 적응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대한민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 하에 수출 산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 전후로는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되고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산업 등을 견제하면서 한국 산업이 치고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 올라탈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한국인의 치열한 노력 덕분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앞선 선진국의 기술과 시스템을 추격한 결과,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치열하게 일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노동생산성은 매우 낮은 편으로 OECD 국가 가운데 하위권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 ‘노동 생산성’은 ‘노동 투입 당 산출의 비율’로 정의되며, 부가가치(GDP)를 총 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을 나타낸다. 노동 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노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높아도 생산성 자체가 낮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노동자의 70% 가 량이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서비스업의 노동력 가치가 낮게 책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노동 생산성 지표는 한국 사회가 치열하게 일하지만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열심히 일하는데 충분한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특별히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지켜온 바 있다. 특히 10대~30대 자살률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또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우울증 비율 1위(36.1%), 불안 증상 비율은 4위(29.5%)에 해당한다. 행복지수에 대한 국제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꾸준히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표는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황과 별개로 시민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회 입법조사처장 이관후는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을 이끌어낸 동력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압축소멸을 초래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수도권 집중, 대·중소기업 간 격차와 같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질은 대한민국 성장 과정의 일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중앙집권적 체제 하에 특정 부문을 집중 지원하며 인적 자본을 갈아 넣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압축성장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직조된 사회 구조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경제의 질적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며 국민의 행복지수를 낮춰 왔다는 데 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과거 발전국가의 경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기존의 양극화는 보다 심화됐다. 사회적 타협과 장기적 전략이 아닌 외부적 타의와 관료주의 체제에 근거한 변화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로의존성3)의 함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저출생이다. 당장 오늘 살기가 각박하고 아이들이 불행한 나라에서 어떻게 출생률이 높게 나오겠는가.


3) ‘경로의존성’이란 한 번 일정한 제품이나 관행에 익숙해져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으로 되더라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구조개혁 플랜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구조적 위기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 것인가. 저출생을 초래하는 높은 경쟁압력을 완화하며, 대한민국을 경로의존성의 함정에서 구해낼 수 있는 개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우선 메가시티 지역균형발전이다. 그간 지역균형발전은 비수도권 공간 이곳저곳에 공공기관을 이전하고 228개 기초자치단체의 요구를 분산적으로 투자하는 형태로 이뤄져 왔다. 이러한 균형발전 전략은 여러 지역의 불만을 공평하게 잠재울 수 있지만,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투자를 어렵게 하여 수도권 블랙홀에 대응할 만한 규모·집적 효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한국은행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부산·울산, 대구, 광주와 같은 지방 대도시 중심의 메가시티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방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광역 교통권으로 연결 짓고,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산업·대학·문화 인프라를 강화함으로써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아도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안이다. 한국은행이 인구 이동과 지역 간 경제효과를 고려한 시나리오를 분석한 결과, 지역 거점도시 집중 투자로 생산성을 제고할 경우 주변 지역으로 효과가 파급되면서, 수도권 위주의 투자보다 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는 노동 이중구조 해소이다. 노동 이중구조를 강화하는 기제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번째 요인은 연공급 성향이 강한 임금체계이다. 연공급제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체계이다. 2014년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 임금의 연공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경향이 발견됐다. 서울대 사회학과 권현지 교수는 “연공급제가 장기근속이 기대되는 노동자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여 관리하는 시스템을 쉽게 정당화한다”고 보았다i). 이에 따라 연공급제 하에서는 내부자(정규직)가 희소한 자원을 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내부자의 규모를 제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는 확대되고 신규 고용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연공급제 중심의 임금체계를 직무급제로 개편해야 한다. 직무급제는 업무의 성격, 난이도 등에 따라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임금체계이다. 개별 근로자가 ‘어디에서 일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 대부분 서구 국가에서는 직무급제가 연공급제보다 지배적이다. 직무급제 요소를 강화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통해 원하청 격차를 줄이고 직업 간 이동성을 늘려야 한다. 이러한 노동개혁은 기존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 및 해고를 유연하게 하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LPMs)4)’을 통해 직업 재교육 및 실업 급여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4)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ALMPs)은 노동자들이 실업 지원 및 직업 교육을 통해 노동시장 미스매치를 해소할 수 있는 정부 정책 프로그램을 통칭한다.


노동 이중구조를 강화하는 두 번째 요인은 기업 간 규모 및 부가가치 격차이다. 글로벌 단위의 수출 대기업과 그러한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이에는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소기업이 대기업 공급망 사슬의 하위 부문을 넘어, 독자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KDI 한국개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사업체 규모별로 파악할 때 우리나라는 대규모 사업체의 일자리 비중이 OECD에서 가장 낮은 국가이다. 추세적으로도 1993~2020년 사이 대기업의 일자리 비중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현행 중소기업 지원 정책은 중소기업의 성장 지원보다는 중소기업일 경우 얻게 되는 각종 세제 혜택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 사업주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중소기업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초래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소기업 규제 중심의 지원 정책을 기업 규모의 성장 중심으로 전환함으로써 저부가가치의 중·고부가가치화를 통해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끌어 올려야 한다.


세 번째, 젠더 격차를 줄이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는 노력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해체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증진되면서 출산율이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선진국 통계 추이에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증가하는 관계가 관측되었다. 1980년대와 2000년대 여성 경제활동참가율과 합계출산율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인구 경제학자 마티아스 됩케 교수는 과거에는 소득 수준과 출산율 사이의 관계를 비교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오늘날에는 육아 분담 등 가족 정책과 출산율 사이의 관계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벨경제학상(2023)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은 경제성장에 따라 선진국에서의 저출생이 나타나는 경향은 보편적이지만, 각 국가의 양육 환경이나 가치관에 따라 출산율이 낮아지는 정도가 달라지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 한국을 비롯하여 합계출산율이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급격히 낮아진 후발주자 국가의 경우,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며 성장의 속도만큼 가치관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지 않은 특징을 보인다. 골딘은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젠더 갭을 저출생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했다.


실제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OECD 38개 국가 중 30번째이고 남녀 간 임금 격차는 꾸준히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동일한 직무에서도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존재하며, 수도권-지방 간 여성의 임금 격차 또한 상당히 큰 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남녀 모두에 적용되는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등을 통해 여성의 커리어에 출산·육아라는 선택이 부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혼외출산이나 생활동반자 등에 관한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는 포용적 사회 인식도 필요하다.


네 번째, 보편적 부담을 통한 사회 안전망 강화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수준은 14.8%로 OECD 평균인 21%보다 낮은 편이다. 또한 국내 사회복지시설 중 민간기관의 비율은 85%에 달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각종 육아 및 돌봄 부담이 개인·가정에 전가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육아 및 돌봄 서비스 부문의 예산 규모를 늘려야 한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국민부담율(세금+사회보장기여금)은 가파르게 상승하여 OECD 평균에 근접했다. 문제는 국민부담율의 증가 속도보다 초고령화·저출생으로 인한 부양비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국민부담율 증가 추세로는 사회 안전망을 확대하는데 한계가 따른다. 지난 10년간 국민 부담율의 증가는 주로 소득세 상위구간, 종부세 등 부문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보편 증세는 이뤄지지 않았다. 공적 연금인 국민연금 또한 노무현 정부 이후 적정한 보험료율 인상 및 구조개혁이 단행된 바 없으며, 전기요금을 비롯한 공공요금 또한 OECD 국가 평균에 비하면 낮은 편에 속한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은 저부담 저복지 국가로 분류되며 미래세대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대기업과 부자만 증세한 복지국가는 없다. 다수 시민의 증세는 부유층이 증세에 동의하도록 압박하고 누진세와 재분배를 통해 서민이 내는 것 이상을 보장 받아왔다.ii)”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하는 체제가 되지 않으면 누군가는 더 고생하는 시스템이 된다. 병원, 돌봄 시설, 발전소 등에서 노동자들이 과로를 호소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임금이 그만큼 지불되지 않고, 고용을 늘리지 않으니 개인이 맡아야 하는 과업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조세는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공동의 기반이다. 공동체 성원 모두가 적정한 부담금을 지불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사회 안전망을 유지해야 한다.


위 네 가지 해법은 씨실과 날실처럼 함께 엮여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높은 경쟁압력을 해소하며 보다 다양한 삶의 선택이 가능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특정한 성공의 표준이 강조되기보단 다양한 커리어가 보장되는 시장이 필요하다. 특정 계층에 부담을 전가하는 시스템이 아닌 모든 시민이 비용을 함께 부담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비효율적인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경쟁을 통해 혁신이 증진되며, 노동자 개개인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포용적인 공동체를 합의해 나가자. 그렇게 하여 한국 경제의 내일에 희망이 있고, 우리 각자가 보다 행복해질 때 저출생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우리 세대의 역할


정부의 저출생 대응 예산은 2006년 2조 1천억 원에서 매년 증액돼 2022년 51조 7천억 원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그렇게나 많은 예산을 썼는데 대응책이 소용 있겠냐”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저출생 대응 예산 분류 집계에는 교육 급여, 공공주택, 반값 등록금 등 복지 정책까지 포함되어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는 정부가 저출산 대응에 정확하게 과녁을 조준하여 재정을 투입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아·돌봄 서비스 지원책을 중심으로 저출산 대응 예산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저출생은 단순히 청년 세대에게 현금 몇 푼을 더 쥐여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구조개혁을 하지 않고 재정만 투입하는 형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환경을 바꾸는 개혁은 한국 경제의 미래와 시민의 행복을 위해서도 절실한 과제다.


돌아보면 한국인은 언제나 힘들게 살아왔다. 사시사철 뚜렷한 기후에, 농사 짓기엔 생산력이 떨어지는 환경에다, 크고 작은 전쟁과 외침을 겪었다. 최근 과학자들은 애초 한국인에게는 행복감을 주는 호르몬 아난마이드 등이 여타 지역 거주자들에 비해 매우 적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낙천적이며 여유로움을 갖고 살았던 선조들은 거친 한반도에서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인은 ‘국난극복의 민족’일 수밖에 없었고, 한반도 위에 세워진 역사는 사람의 의지로 이어져 왔다. 식민지와 전쟁 폐허 위에 세워진 이 나라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시민 한 명 한 명의 노력 덕분이었다. 세대, 지역, 이념, 성별을 뛰어넘은 모두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우리 세대에겐 모든 것이 주어져 있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결실, 그 이면의 부조리까지. 산업화와 민주화를 주도했던 앞선 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에겐 단일한 시대정신이 부재하며 치열한 경쟁 속에 당장 먹고살기 바쁘다. 굳이 따지자면 “어차피 세상은 망했고 각자 열심히 살아보세”가 오늘날 우리 세대의 구호일 테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은 망했다며 이대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끝낼 순 없지 않겠는가.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해 치열하게 논쟁하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대한민국이 압축성장 과정에서 놓쳐버린 숙의의 시간을 열어야 한다.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의 질적 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어쩌면 현재의 위기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보다 혁신적이고 포용적이며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을 구성하자. 그래도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을 상상해 보자. 이 나라의 미래는 우리 세대가 하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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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혜원, “노조여 세상을 바꾸려면 호봉제부터 바꿔라”, 시사IN, 2021.01.25.

ii) 김수민,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콘크리트 유토피아, 씨네21,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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