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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익 Mar 06. 2022

당신을 파괴함으로써, 구원하는 사랑의 역학.

폴 토머스 앤더슨, <팬텀 스레드>

여기 자신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구원될 수 있는 남자가 있다. 가지런한 원칙으로 구축된 그의 성채에는 쥐새끼 하나 들어올 구석이 없다. 그는 옳기 때문에 옳아야 하는 사람이고, 규율을 두르고 기준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돌려 막는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계속 만들면서, 그녀에 대한 원초적인 상실감을 덧씌운다. 그에게 드레스 만드는 일은 상처를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자 영혼을 갉아먹는 저주이다.


그런 그에게 알마가 찾아온다. 알마, 포르투갈어로 '영혼'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주체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라는 레이놀즈에게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며 맞서는 사람이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곁을 거쳤던 수많은 뮤즈들과는 달랐다. 알마는 그의 원초적인 상처를 간파했고 동등한 연인의 관계로 인정받길 바랐다. 그녀는 강박증으로 둘러진 그의 성을 허물고 그를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인다.


알마는 레이놀즈를 위한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돌아온 레이놀즈의 반응은 차가웠다. 되려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냐고 성을 낸다. 상처받은 알마는 속마음을 토해낸다. 그의 삶을 둘러싼 부자연스러운 규칙들은 괴상한 게임과 같다고, 그걸 깨부수고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겠다고. 이에 레이놀즈는 자신의 세계를 받아들지 못하겠다면 그냥 떠나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알마는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 극단적인 처방전을 찾아낸다. 독버섯을 먹여 그를 무장해제시키고 전유하겠다는 처방전.


그렇게 첫 번째 독버섯 게임이 진행된다. 독차를 마신 레이놀즈는 벨기에 공주를 위해 만들던,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넘어뜨리며 쓰러진다. 알마는 마침내 일을 손에서 놓은 레이놀즈를 보살필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된다. 영화는 침대 위에 누운 그의 시야에 비친 엄마의 환경을 보여준다. 대답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한 엄마의 환영(幻影). 레이놀즈는 엄마를 그리워한다. 보고 싶었다고, 무슨 말을 하시냐고. 그리고 알마가 방으로 들어온다. 환영은 알마와 잠깐 동안 함께 있다가, 알마가 그에게 접근하자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마 그때 깨달았으리라.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보듬고, 엄마의 존재를 대체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알마라는 사실을. 다음 날 아침,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청혼한다. 이제 이 결벽한 집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결혼이 모든 걸 바꿔놓진 않는다. 귀족 부인의 파티에 초대된 부부는 또 갈등을 빚는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새해 전야 파티를 가자고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자신만의 루틴이 있던 그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는 알마가 파티장으로 한참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그녀를 쫓아간다. 그다음 날 아침, 레이놀즈는 세상이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게 돌아감에 분노하고 그 이유를 알마가 자신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에 덧붙인다. 이를 들은 알마는 다시 두 번째 독버섯 게임을 준비한다.


두 번째 게임은 첫 번째와 달리 눈에 보이는 판이었다. 알마는 레이놀즈가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괴상한 요리를 준비한다. 특정 요리만 추구하는 레이놀즈는 수상한 점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지 않는다. 알마가 대접한 독버섯 요리가 자신의 것이 절대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것이 알마가 의도적으로 조리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란 듯 버섯 요리를 삼켜낸다. 이렇게 두 번째 게임에서도 알마는 승리한다. 의도대로 레이놀즈는 무너진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레이놀즈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는 거부하지 않고 마침내 변화의 필요성을 수용했다. 스스로에 대한 파괴를 긍정함으로써 알마로부터의 구원을 선택한다. 그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은 그 보호막을 벗음으로써, 비로소 몸이 무너져서야, 그는 엄마에게서 꿈꿨던 사랑을 품게 되고 안정을 찾아간다.


독버섯을 먹이고 먹는 선택은 일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따져보면 살인 미수 아닌가? 그러나 병들고 아픈 그들에게 있어 사랑에 관한 처방은 병리적일 수밖에 없다. 또 치명상을 입은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극단적인 처방으로 나아가야 했다. 죽음의 상황까지 갈 수 있지만, 혹은 그런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독버섯 요리는 내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다. 상대를 바꾸고 싶은 욕망에 휘둘리고, 나의 세상을 무너뜨려야 하는 싱황을 마주한다. 그렇게 사랑은 피학성과 가학성 그리고 무장해제의 역학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직조된다. 두 인물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또 상대를 파멸시킴으로써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은 파괴됨으로써 구원되고, 죽음 앞에서 비로소 뚜렷해진다.


...


<팬텀 스레드>에 관한 팟캐스트 방송(아래 링크)을 준비하면서 2주 동안 PTA 감독의 장편을 모조리 보았다.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를 꿰뚫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어딘가 부족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의지하고 또 사랑하는, 관계의 역학을 다룬다. <팬텀  스레드>는 그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영화이다. 병리적으로 회고되는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갖고 있는 가학과 피학의 미묘한 역학을 추적한다. 우아하고, 유려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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