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킬링 디어>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실수로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였다. 신의 분노를 산 아가멤논은 저주를 받아 트로이 원정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2년을 기다리다 지친 그는 신탁을 찾아간다. 신탁은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재물로 바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답을 내린다. 전쟁 영웅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컸던 아가멤논은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고 전쟁에 출전한다.
딸을 불쌍하게 여긴 아르테미스는 제물로 바쳐진 딸 이피게네이아를 암사슴과 바꿔치기한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사제로 삼는다. 딸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선택을 했다는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딸은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아가멤논은 혈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쟁 후 돌아온 아가멤논은 결국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된다. 전쟁 후 돌아온 아가멤논은 결국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된다. 이후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위한 복수로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
실수로 죽인 사슴 한 마리의
대가가 잔혹한 비극으로 돌아왔다.
영화는 수술대에 오른 사람의 심장을 비추며 시작한다. 스티븐은 심장을 다루는 의사다. 누군가의 생명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전지전능한 인물처럼 비춰지는 의사 스티븐은 이성적 사고의 힘을 믿으며 취향이 확고부동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스티븐은 어느 날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어느 날 음주한 상태로 수술대에 올랐고, 마틴의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영화는 실수의 구체적 과정은 비추지 않는다. 대신 그 실수가 발생한 이후의 날들, 이후 상황과 형벌을 조망한다.
스티븐은 병원을 찾아오는 마틴을 극진히 대한다. 마틴 또한 스티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느 날 스티븐은 마틴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메탈 시계를 선물한다. 마틴은 이에 감사함을 표한다. 그러나 그가 바란 것은 메탈 시계가 아니었다. 그는 메탈 시계를 받자 그다음 날 가죽 줄로 시계를 바꿔 차서 나타난다. 스티븐은 마틴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물질적 교환으로 덜려고 했다. 그러나 마틴이 바란 것은 물질적 보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스티븐이 자신이 겪은 고통만큼의 대가를 등가적으로 치르길 바랐다.
그래서 마틴은 스티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마틴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스티븐은 마틴에게 일종의 게임을 제안한다.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만 모두가 살며, 죽이지 않을 경우 다리 마비-거식증-안구출혈의 단계를 거쳐서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처음에 스티븐은 이를 믿지 않았다. (사실, 누가 믿겠는가?) 아들이 걷지 못하게 될 때에도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학적 진단을 추구한다. 그러나 저주가 비로소 과학으로 설명 불가한 지경에 이르자 그는 고민 끝에 랜덤으로 총을 쏘아 가족 중 한 명을 죽인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복수극은 말이 안 된다. 형벌이라 하면 그 상황과 맥락에 맞는 실질적인 심판이 필요하다는 게 현대적 논리다. 스티븐 아내인 '안나'가 항변했듯 연좌제는 잘못된 낡은 문명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적 교환으로서 복수>를 연출한다. 그리고 끝내 실현한다. 왜 영화는 이런 방식의 복수를 끌고 왔을까?
나는 이를 일종의 '공감'에 관한 윤리적 문제제기로 봤다. 우리는 어떤 사회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분노 혹은 연민을 느낀다. 파렴치한 살인자를 때려죽여야 한다고 얘기하거나 피해를 입은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마음을 표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 혹은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가?
영화 속 스티븐의 태도를 보자. 그는 겉으로 마틴에게 물질적 이전으로서 자신의 죄를 덜려고 할 뿐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만함에 대한 심판이자 윤리적인 시험으로서 등가교환적 복수는 '말도 안 되지만' 그 정연한 간결성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똑같이 고통 받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공감의 논리에서.
그렇다면 '마틴의 복수'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일단 성공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마틴은 결과적으로 스티븐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기존 스티븐의 가정은 파괴되었고, 마틴이 언젠가 '좋아하는 것은 나중에 먹어요'라며 미뤄뒀던 포테이토를 킴이 먹는 장면이 비침으로써, 그의 욕망이 결과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암시에 주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마틴의 복수는 실패했다는 관점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마틴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그 가족이 삼각형에서 직선으로 해체된 것과 달리, 스티븐의 가족은 사각형 가족이 삼각형의 구조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등가적 교환은 실질적 교환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븐의 가족은 어딘가 불안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들 가족은 네 명이었을 적에도 이상할 정도로 우울하고 삭막한 풍경을 보였다. 적어도 아버지 스티븐은 죽은 아들보다 살아있는 딸과 더 친밀한 관계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틴의 가족은 불안한 사각형 모형에서 불안하지만 '가장 안정적인 도형 형태'인 삼각형으로 개선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서 마틴이 더 나아졌는지에 관한 의문이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신이어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된 신들이 그러했듯, 신인 그조차 완전한 고독과 분리의 관계에서 행복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등가적인 교환은 그저 형식적인 정의의 구현일 뿐 아버지를 잃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되려 남의 가정에게 이해할 수 없는 상흔만 남겼을 뿐이다. 그렇게 신의 교환은 성공적 복수가 아닌 실패한 복수가 되었고, 정의의 구현이 아닌 씁쓸한 뒤끝만 남겼다.
나는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무슨 생각을 남겼는지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리스 비극을 차용하면서 얘기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등가교환적 복수에 관한 옹호>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대신 현대적 시각에서 이러한 복수의 방식이 전개된다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을 조망하고 보상해야 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오만하지만 무력한 인간과, 전능하지만 무력한 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말이다.
무겁고 건조하다. 영화 오프닝과 함께 강조되는 '수술대 위의 심장'은 충격적이다. (와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영화의 내용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데 영화는 이렇게 감정이 극에 달할 만한 요소를 정제된 시각에서 정연하게 보여준다. 충격적인 심장 씬부터 인물을 보여주는 구도는 카메라의 시선으로서 불편함을 자아낸다. 이해할 수 없는 윤리적 시험을 다루면서 인물의 대사와 표정에 감정을 덜어내면서 감정이입 가능성을 차단한다. 배경에 깔리는 교향곡이나 신경을 긁는 듯한 음향,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간 배치는 '우아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