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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익 Jan 05. 2022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드니 빌뇌브,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때로 진실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진실을 직시해야 할 때도 있다. 나왈은 유언을 통해 자식들에게 기어코 불편한 진실을 보게끔 한다. 쌍둥이가 어머니의 과거를 밟아 진실을 발굴하는 이야기는 스릴러 추리물 같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다소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소재를 건조하고 차분하게 조망함으로써 ‘몇몇 영화들이 거쳤던 실패의 선'을 밟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불편한 진실을 우아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증언의 끝에서 마주한 메시지는 온갖 갈등과 학살로 점철된 인류 역사에 당연하고도 무거운 교훈을 던진다.


레바논의 아픔


영화의 원작은 레바논 태생 캐나다 작가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이다.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무이와드의 연극을 보고 ‘위로(consolation)의 충격’을 받고는 판권을 사서 연극을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각색한 원작을 고려했을 때 이 영화는 ‘레바논의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배경 국가를 가상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레바논 얘기를 모른다고 하여 영화를 보는데 생기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층 흥미롭게 감상하기 위해선 레바논이 겪었던 일들을 한번 들춰보면 좋을 것이다.


레바논은 종파별 인구구성이 복잡한 나라다. 그래서 헌법에 아예 각 종파별로 권력을 분립한다는 원칙을 명시해뒀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안은 미봉책에 가까웠고 레바논은 건국 초기부터 수년간 종파별 이해관계에 따라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1980년대에 이르러선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유입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둥지를 틀게 되면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마론파 기독교인은 무슬림과 난민을 죽였고, 무슬림은 기독교인을 죽였다. PLO를 소탕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레바논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인접국인 시리아와 전쟁을 하고, 1983년 전쟁 때는 레바논 수도인 베이루트까지 진격한 일이 있었다.


영화에서 묘사된 기독교 민병대의 민간인 학살은 실제 이 시기에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가 행했던 학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학살은 또 다른 테러를 낳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졌다. 내전의 굴레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어 레바논은 현재 극심한 경제난과 정국 불안을 겪고 있다.


감당하며 살아내는 저항.



'나왈'은 그 시대 레바논 여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층위의 고통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얽힌 혈연관계는 자연스레 '오이디푸스 비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왈은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오카스테보다 더 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처럼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을 거부하기보다는 그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


그러나 이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이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 된다.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폭압을 견뎌가며 그녀는 살아낸다. 이 점에서 나왈은 '시대의 피해자'인 동시에 고통을 이겨낸 '숭고한 저항자'라 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나왈의 편지는 그녀의 자식들에게 전달된다. 자신의 사랑으로 키웠지만 사랑으로 낳지 않았던 쌍둥이와, 사랑으로 낳았지만 결코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없을 아들에게. 나왈은 세 사람 모두에게 따스한 위로와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을 고문하고 강간했던 아들을 용서한다.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야."라고 얘기하며 말이다. 나왈은 감당하며 살아내는 삶 속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현실을 돌파하는 길은 '사랑'의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이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 거야.”



모든 반전(反戰) 서사가 그러하듯, 그 어떤 이념과 교리의 가치도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점을 영화는 지적한다. 그리고 악한 개인의 양상을 조성해내는 '현실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고문기술자였던 아부 타렉을 탓하기만 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행한 반인륜적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부 타렉이 그렇게 인간 무기로 양산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굴레’에 대해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굴레는 아부 타렉이 ‘선택하지 않은,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나 이 운명이란 '무작위적인 신의 뜻'이 아닌 '인간 세계가 만들어낸 현실 구조'이다. 그래서 운명 자체가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서 기인한 가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우리가 극복 가능하고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이미 겪은 일은 흘려 두더라도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 대한 고리는 끊을 수 있다.


그래서 나왈은 이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이 중요함을, 그렇게 해서 분노의 복수가 반복되는 현실 구조를 해체해야 함을 얘기한다. '현실의 구조'는 보복과 청산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해체될 수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두 죽이거나 압도하는 상황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럼에도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와 화해는 진실에 대한 명확한 기억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한 개인을 벼랑으로 내몰며, 우리 전체를 둘러싼 악독한 굴레를 분쇄해야 한다.


사실 이런 교훈은 누구나 알고 있고 들어 본 얘기이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이것이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이기에 문제는 더욱 어렵다. 어느 이스라엘인과 어느 팔레스타인인이 친구가 되는 일은 쉬울지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화해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쪽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보다는, 그래도 최선의 약속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쉬운 길임을 말이다.


드니 빌뇌브, 시선과 템포


드니 빌뇌브는 주제의식을 정제된 시선으로 진중하게 풀어 나간다. <그을린 사랑>은 끔찍한 살육과 고통의 장면을 담았지만 그것을 거칠게 극화하지 않았다. 인물의 감정은 깊이 있되 절제된 것처럼 보이며, 숏의 전개는 긴박하기보다는 느리고 건조하다. <그을린 사랑>을 넘어서 <시카리오>, <컨택트> 그리고 <듄 part1>에 이르기까지, 빌뇌브의 영화적 시선과 템포에는 우아한 관조가 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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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다양한 이야기 - < 시네마해체 25. 그을린사랑 > 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80099/episodes/24222915?ucode=L-mFzZlP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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