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 트랜짓 (2018)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은 사람일까요?” , 여기 항구를 떠나지 못하고 이별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이름으로 비자를 발급받은 남자는 여인에 이끌려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안나 제거스의 소설 <통과비자>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어 부유하는 사람들을 비추며 인간의 실존과 역사의 현재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게오르그’는 마르세유의 멕시코 영사관이 작가 ‘바이델’에게 부친 편치를 전달하기 위해 바이델을 찾아간다. 그러나 바이델은 이미 자살한 뒤였고, 게오르그는 그의 편지와 가방을 품은 채 마르세유로 떠나게 된다. 마르세유는 나치 독일의 점령을 피하고자 한 사람들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돈이 떨어진 게오르그는 사례금이라도 받자는 생각에 공사관을 찾아가지만, 공사관은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하고 게오르그는 바이델이 되어 비자를 발급받게 된다. 그러나 바이델이 아직 살아있으며 그와 재회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 작가의 부인 ‘마리’를 만나게 되면서 게오르그의 도피 계획은 굴절한다. ‘마리’는 의사인 리처드와 함께 동거하는 상황에 있었는데, 리처드와 함께 배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편 생각에 끝내 배에 내렸던 여자다. 리처드 또한 그런 마리를 쫓아 다시 항구를 배회하게 된다.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두 남자는 ‘마리’라는 종 잡을 수 없는 유령 같은 여인에 얽혀 사선을 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한다.
남편을 기다리면서도 두 남자와 함께 했던 마리는 그들을 사랑했을까? 그저 남편을 기다리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잠깐 가둬두기 위한 그릇이었을까? 남편으로 도달하기 위해 혹은 탈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마리가 남편에게 부쳤던 두 편지는 전혀 다른 얘기를 전한다. 하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었고, 후에 부친 편치는 부디 돌아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남편을 향한 마리의 사랑 또한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고, 두 남자에 대한 사랑은 더더욱 불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진위 여부가 아니라 이 관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테다.
마르세유에 몰려든 사람들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영사관 앞을 떠돈다. 그런데 해당 비자는 그 나라에 정착하여 삶을 꾸려나가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내가 당신의 나라에 계속 머물지 않을 것임을 증명해야 발급받을 수 있는 통과증이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야 하는 자들은 대게 스스로를 뭐라 규정 지을 수 없는 경계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누구인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기에 수용소에 끌려가야 하고, 혹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위조하여 규정해야 하는 역설에 부딪힌다.
유랑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어 배회하는 유령이 되는 길밖에 없다. 두 마리 개를 데리고 다닌 여자는 편안한 담배 한 개비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생을 마감으로써 지옥과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게오르그의 도움으로 마리가 탈 수 있었던 그 배는 결국 전복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런 대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언젠가 바다 너머로 떠나는 ‘트랫짓’의 서사는 ‘살다가 저 너머로 넘어가는 삶과 죽음’에 관한 메타포로 비친다. 선택권이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극복할 수 없는 시대적 풍랑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다. 그저 ‘여기에 머물다 저기로 떠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운명의 풍랑 속에서 어디로 튈지 모른 채 부유해야 하는 우리 삶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영화 속에서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실낱 같은 증거를 포착하고 싶었다. 소년 '드리스'와 '게오르그' 사이에서 틘 우정을 생각한다. ‘드리스’는 약자 중의 약자이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체류자로 건강도 썩 좋지 않아 보이는 소년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온전한 소통이 불가한 입장에 놓여 있다. 이들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줄조차 설 수 없으며, 여기에 존재해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이다. 게오르그는 그런 드리스를 친아들처럼 또 친구처럼 대한다. 라디오를 고쳐주며 '모든 만물에겐 집이 있다'는 슬픈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 이 영화 속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영화가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바텐더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난민들 사이의 연결책이 되어주는 증언자이다. 또 당당하게 싸울 수는 없어도 경찰에 끌려가는 여인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감정을 교감하는 마리와 게오르그.. . 이런 관계들을 보며 '부조리가 반복되는 우리의 삶' 속에도 '인간성의 반복'으로써 낙관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생각하고 싶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현재 유럽 도시의 풍경을 비춘다. 이러한 연출은 자연스레 오늘날 유럽 사회가 직면한 난민 문제를 환기시킨다. 과거의 문제가 그저 과거의 것이 아님을 얘기한다. 2015년 이후 시리아 내전으로 유럽에 몰려든 난민의 행렬은 ‘난민위기 Refugee crisis'라는 현상으로 불리는 시대적 변곡점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서구 유럽은 오늘날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개방과 진보의 유러피안 드림은 재정위기, 난민위기, 브렉시트, 팬데믹 등 거친 파도에 부딪히며 시험대에 올랐다.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는 다양성의 공간, 그 속에서 저마다 소속감을 찾고자 하는 귀속감의 진동, 들끓는 혐오와 갈등의 공명... 분명 다르지만 또 비슷하게, 2021년의 유럽은 1930년대 유럽의 폭풍전야를 떠오르게 만든다.
<트랜짓>은 독일 베를린파 대표 감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 <운디네>와 함께 “역사 3부작”으로 묶이는 작품이다. 페촐트 감독이 '역사 3부작'이란 카테고리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세 영화가 시기 순으로 비슷한 주제와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게 묶인다. 또 역사 3부작 이전에 나온 페촐트 감독의 3개의 작품은 '유령 3부작'으로 분류되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페촐트 감독은 앞으로 '독일 신화를 바탕으로 한 낭만 3부작을 만들 것'이라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역사 3부작 영화들은 모두 '경계의 공간에서 역사적 문제를 다루며 부유하는 인간의 실존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역사 3부작에 관해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고 싶다.
“역사를 다루는데 거창한 사건과 감동 서사가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궤적에서 과거를 현재적으로 환기하며, 그 속에서 오늘날을 관통하는 실존과 부조리에 관해 얘기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 허무와 염세에 빠지기보다는, 실낱 같은 희망과 성찰의 여지에 대해 노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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