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공화국의 그린 뉴딜.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은 오늘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모두가 ESG 투자에 주목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논의들에서 방점은 주로 ‘어디서 어떻게 전력을 생산할지’에 관한 발전원 이슈에 찍혀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생산의 문제’를 넘어 지역적으로 이를 ‘어떻게 분배하고 관리할지’에 관한 질문도 던져봐야 한다.
문제는 그리드(Grid)야!
‘그리드(grid)'는 전기를 생산해서 송전, 분배하며 수요와 공급을 관리하는 전반적인 시스템을 의미한다. 크리스천 바크는 저서 <그리드>에서 '그리드'를 “생산된 전력을 거의 실시간으로 배송하며, 망이 연결된 모든 지점으로 표준화된 전류를 쉽게 이송하는, 아주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드 시스템이 주요한 고려 대상이 되는 이유는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도입이 기존 망에 포함되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의 주요한 특징은 '변동성'이다. 재생에너지는 석탄을 태우거나 핵분열로 그때그때 전력을 조절해서 생산할 수 있는 발전원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이나 그날의 풍속이라는 변동성이 있는 자연환경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은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전력을 덜 생산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필요한 것보다 전력을 더 생산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전력을 더 생산하면 좋은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드 시스템에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A가 100이 필요하면 100만큼 보내줘야 하지, 110이 되면 과부하가 걸리고 블랙아웃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중앙 관리형'이 아닌 '분산 관리형'에 가까운 재생에너지가 도입됨에 따라 그리드의 재조정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그리드가 '노후화'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나라보다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 국가들에서는 노후화된 전력망으로 인한 블랙아웃이 발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과거보다 더 많은 전력을 더 먼 곳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석탄 태워 공장 돌리던 산업화 시절'에 세워놓은 시스템이 지속될 리가 없다. 그래서 이런 전력망의 노후화와 함께, '전통적 발전원의 퇴출'과 '분산적 재생에너지원'이 추가되면서 변화가 절실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크니컬 한 해법. ESS?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런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술 혁신이다. 그래서 근래에 이르러 ‘에너지 저장기술 ESS’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재생에너지가 초과 생산한 전력이 생기면 그걸 저장해두었다가 후에 소비하는 식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보기엔 간단한 원리지만 실제로 구현하기는 어려운 기술이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은 저수지에 물 저장하듯 보관할 수 없다. 전기에너지는 '전하들이 큰 전압 차로 분리된 상태'로 정의되는데, 많은 전하들을 분리해서 그대로 저장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비유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달리 전기는 유체역학을 따르는 액체나 기체가 아니라 힘(force)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ESS 기술은 이러한 전기에너지의 특성을 고려하여 구성된다.
ESS 기술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배터리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비 배터리 방식'이다. 비 배터리 방식에는 양수발전, 압축공기저항, 플라이휠 등 다양한 조합이 있는데 각자 환경에 맞게끔 배터리, 수소저장기술, 저수지를 활용한 양수발전 등 조합의 확보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전기차의 보급에 따라 전기차를 그리드 망과 연결하여 ESS를 활용하는 V2G(Vehicle To Grid) 상용화 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ESS를 어디에 어떻게 만들 것인지는 한국 사회의 자체적인 지리 환경이나 주거조건을 고려하여 적용해야 한다.
ESS+재생에너지와 연계된 그리드 망이 확충되면서는 실시간으로 전력 수급을 체크하며 요금까지 책정할 수 있는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 권역에서는 마이크로그리드 체계가 조성되는 변화가 나타날 것인데, 마이크로그리드(Microgrid)란 '분산 에너지원을 수용해서 소규모 단위로 에너지 수급을 관리하는 '지역적인 전력망'이다. 미국에서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나 미군기지에 마이크로그리드를 구축했다. 일본은 지진 등 재해 시 전력공급을 해결하기 위해 소규모 전력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중국은 송배전 설비를 설치하기 어려운 도서지역에 마이크로그리드를 도입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주로 도서 지역에서 에너지를 독자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논의되는 케이스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 공화국의 에너지 전환.
우리나라에서 전력수요가 가장 많은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권이다. 문제는 이런 수요가 갈수록 몰리고 있다는 데 있다. 단순히 인구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어마한 전력을 요구로 하는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등이 수도권에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다.
현재 이런 수도권의 전력이 많이 의존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충남 당진 등 석탄화력 발전이다. 그런데 문제는 탄소중립 관점에서 석탄화력 발전은 가장 먼저 중단될 것이고 퇴출되어야만 하는 발전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발전원을 충당하여 끌고 올 것인가? 결국에는 지방에서 전력을 더 끌고 와야 한다.
그렇다면 ‘지방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 보자. 앞서 언급했듯 그리드 시스템에서는 '초과공급' 또한 문제가 된다. 예컨대 현재 풍력발전 등을 포함하여 재생에너지가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는 지역이 전라남도(전남)이다. 전남은 한국에서 재생에너지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현재 전남에 그 모든 전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는가? 없다. 수요는 수도권이 몰려 있기 때문에, 초과공급된 전력은 송배전망 확충을 통해 수도권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송배전망 확충은 귀운 일이 아니다. 누가 본인 땅에 송전탑 세우는 걸 쉬이 받아들이겠는가. 과거 밀양 송전탑 사건 같은 갈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드 재조정이 지역 간 갈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재생에너지 보급 자체에도 갈등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현재 몇몇 전남 농촌 지역에서는 태양광 발전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반대의 근거는 '에너지 전환에 동의 못하는 반동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재생에너지 설비 때문에 우리가 피해 본다'라는 생존 문제에서 기인하고 있다. 우리나라 농민들 중 절반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토지주들이 발전 사업자들에게 토지를 임대하게 되면서, 태양광 발전에 밀려 농민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탄소중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농촌이나 해안, 저수지 등에 태양광/풍력발전 설비 등을 많이 확보해야만 한다. 재생에너지 보급률이 높은 유럽 사회에서는 농민/지역단위 스스로가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생산해서 소비하는 게 더 싸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농어촌 지역주민이 이익의 측면에서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대할 수 있는 유인책을 확대해야 한다. 동시에 그리드 시스템 자체가 도농 격차, 지역 불균형 발전이라는 배경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방을 단순 ‘수도권의 배후지' 정도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지방 소멸’이라는 현상 자체를 함께 개선해 나가야 한다.
슈퍼 그리드, 한전.
더 넓은 시각에서 안타까운 점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섬나라’라는 사실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국경을 넘어 서로 전력망을 공유하는 슈퍼 그리드를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와 독일은 탈원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다른 에너지 믹스에 근거하여 전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동시에 두 나라는 전력을 서로 사고파는 관계에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서로 전력을 주고받음으로써 리스크를 관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주변 지정학적 관계를 고려했을 때 슈퍼 그리드 조성은 사실상 불가하다. 에너지 리스크를 오롯이 자급자족으로 해소해야 한다.
무엇보다 '전력의 소비~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시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전이 모든 걸 독점하는 체계가 합리적이고 유연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현재 각 가정이 지불하고 있는 전력요금은 적정한가? OECD는 2020년 보고서에서 “한국의 저렴한 전기 요금 정책이 재생에너지의 시장 진입은 물론 향후 전력 수요관리에 대한 투자를 저해한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주요국 평균에 비해 전력요금이 낮은 가운데 송배전사업을 한전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드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현재 지방-수도권 송배전망과 관련하여 한전과 정부/지자체도 많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지중화 등을 고려한 송배전만 건설의 진척 속도는 여전히 느려 보인다. 또 한전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까지도 주도적으로 진출한다면 과연 전환에 대한 비용과 투자가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겠냐는 전력시장 개방에 관한 문제의식도 제기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위하여
비교적 최근 산업화에 달성하고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안정적이고 젊은 전력망 시스템을 관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탄소중립을 이행하기에 결코 쉬운 환경에 있지 않으며, 거대한 전환 앞에서 바꿔야 할 점들이 많다. 단순히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 이를 지역적으로 어떻게 배치하고 관리해 나갈지에 대한 총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나 '그린 뉴딜(New Deal)'이 말 그대로, '뉴-딜 New-Deal)'-"새로운 계약"을 수반하는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짜 그린뉴딜을 위해서는 일차원적인 기술 혁신을 넘어, 지역-조세-산업 등 영역을 교차적으로 인식하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