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감, 세습 중산층, 원하청 사회, 세대론의 함정
학교 인권강좌 소감문을 쓰는 김에 호다닥 쓰는 글..
'공정이란 무엇인가’, ‘청년 세대가 그리는 공정은 무엇인가',
'우리는 공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나'.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고 여전히 뜨거운 질문이다. 사실, 식을 수도 없고 계속해서 던져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권강좌 1강에서 강사님은 이러한 질문들을 둘러싼 이슈와 이면에 대한 문제제기를 발제하였다. 요지는 이러했다. "오늘날 청년들이 공정에 민감한 이유는 분명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공정에 대한 담론이 능력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이 크다", "세간이 얘기하는 공정 담론은 불평등을 비롯한 핵심적 문제를 지적하고 해소하는데 부족하고, 소수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강사님의 관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정 담론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사뭇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공정 담론>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본다.
"공정하다는 느낌"
임명묵 작가는 <K-를 생각한다> 란 저서에서 청년세대의 공정 인식을 ‘공정감 感’으로 규정한다. 몇 가지 이슈에서 청년세대가 반응하는 공정은 특별한 가치나 논리에 근거한 것이기보단, 해당 문제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관한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대응이라는 지적이다. 오늘날 청년세대가 이전 세대와 비교했을 때 공정에 관한 특별한 담론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오늘날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몇 가지 사회상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경쟁의 일상화, 심리적 압박, SNS 커뮤니티, 탈가치 등이 그러한 변화이다. 이러한 '불안함' 속에서 그래도 청년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예측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국가 시스템"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과 질문지를 던지며 그 결과 또한 납득 가능하게 만드는 평가 시스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인국공 사태나 정시/수시 논란 등에 있어서 청년들이 왜 능력주의 지향적으로 반응했는지는 이러한 공정에 대한 세대 감각을 통해 분석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공정에 대한 정서’를 감안하고 나면 이제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왜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졌냐' --'그러면 저성장 때문이냐 신자유주의 때문이냐 무엇 때문이냐' --'그런데 따져보면 과실은 다 소수가 독점하고 있던데!' --'핵심은 불평등인데 말이야..' 같은 논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강사님 또한 관련 이슈를 다룸에 있어서 오늘날 경제적 양극화 - 불평등 - 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언급했다. 이러한 통계는 구체적으로 덧붙이지 않아도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복지를 통한 분배가 절실하다는 식의 개혁안에 대해 논리가 이어지게 된다.
세습 중산층 사회
많은 선거구호와 헤드라인은 불평등의 문제를 상위 1%와 나머지 99%의 계급 대결로 묘사하고는 한다. "아주 소수의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 해당하는 다수 시민들의 요구를 이행하라"는 구호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양극화의 전선이 1:99의 구도로 그여 지고, 그러한 계급투쟁의 구호로써 완화되고 해결될 수 있을까?
오늘날 불평등이 세습되는 배경은 자산과 소득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을 기반으로 중산층이 세습되는 국면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리브스가 <20 vs 80의 사회>에서 얘기한 것처럼, 오늘날 계급 격차는 <상위 1% vs 99%>가 아닌, < 상위 20% vs 80%의 전선>에서 그어지고 있다. 이러한 계급 전선의 관점에서 조귀동 작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중산층 세습 사회>라고 지칭하며 동명의 책을 통해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오늘날 불평등의 세습은 귀족이 아들에게 작위 물려주듯 독점적인 부를 다음 세대에게 그냥 증여함으로써 이뤄지는 게 아니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바람직하고 당연한 방식으로 '능력'이 세습되고 지위가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와 '복지 재분배 전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교육'이 '계층 상승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능력에 기반한 세습의 과정'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위 20%가 아니더라도 '계층 상승을 위한 과정'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교/교육의 전격적인 평준화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직업과 환경에 따른 숙련 그리고 이와 연계한 대학 구조개혁의 방향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더 두텁고 촘촘한 복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증세를 필요로 하고 중산층의 부담과 연대를 요구한다. 혹자는 중산층 증세를 이행하기 위해선 그들에게 혜택 주는 수단을 늘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일리 있는 말이고 과세 원칙에 부합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중상위층 중심의 복지 시스템'을 명분상 확대해 나가는 게 가능하냐는 문제에 부딪힌다. '세금폭탄론'과 '역진성'의 딜레마를 동시에 해소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보편복지 확대는 추세였고 앞으로도 나아갈 길이다. 그러나 사각지대를 편하게 해소할 수 있다는 경제적 효용에 근거한 논리 너머로, 사각지대를 찾아내서 집중적 보조를 할 수 있는 사회보장적 해법을 들여다 봐야 한다.
원하청 사회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던 그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한국 사회에서 '시험'을 바탕으로 한 '경쟁'은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전통은 개량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부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분명히 그것이 한국 사회의 진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바도 있고 통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경쟁'이 '불평등을 세습하는 통로'가 되고 '모두에게 동일한 출발선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고려해야 한다. 학벌 등을 통한 지대 추구는 바람직하지 않을 때가 많으며 그를 쟁취하기 위한 과도한 에너지의 소모는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경쟁에 대한 문화와 감각, 그리고 이와 연결된 불평등 문제에 대해 어떻게 <건강한 전환>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한 경쟁'에 대한 문제의식과 '불평등 해소'라는 테마가 교차적으로 바라봐야 할 한국 사회의 대목이 바로 '노동 이중구조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은 '원청과 하청이 분절된 구조'로 요약될 수 있다. 원청에 한번 소속되면 상대적 고임금 고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애초부터 시험을 못 치거나 원청이 아닌 하청을 돌게 되면 은퇴할 때까지 '그 바닥'을 돌아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 본인이 만났던 청년 노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일자리의 계단이 무너졌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없고, 오랫동안 일한 과장님이 나와 똑같은 임금을 받는 현실을 봐야 한다." 인국공 사태에 분노했던 취준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좁은 문을 뚫기 위해 어려운 경쟁을 거쳐서 통과해야 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정규직이 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개별적 상황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공정' 담론의 핵심은 <노동개혁>이 되어야 한다. 노동 이중구조를 해소하여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포용적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며, 경직된 시험 능력주의가 아니라 직무와 숙련에 근거한 경쟁의 표준을 세워 나가야 한다.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이러한 '원하청 사회'의 뼈대가 되는 '연공급제'가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벼농사 체제'라는 역사문화적인 맥락에서 도출한다. ( <불평등의 세대> , <쌀 재난 국가> ) '동아시아의 벼농사 체제'는 '협업과 경쟁의 이중주'로 비유되는 독특한 문화적인 경관을 빚어냈다. 그런 점에서 ‘나이에 기반한 조직 내부와 연공 구조’는 유교적 문화와 벼농사 체제 사이에서 배양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연공급제에 근거하면 연장자에게 보다 큰 권력과 보상을 부여하며,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자에게 노동의 성과를 상찬하고 반대급부로 조직 사회에서의 인정과 후계지위를 보장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연공급 구조와 함께 세계화와 함께 도입되어 확산된 노동시장 유연화 기제는 '비정규직/정규직 - 대기업/중소기업 - 유노조/무노조'라는 층위에서 또 다른 불평등을 낳는다.
여기서 이철승 교수는 ‘세대'라는 축을 추구하여 불평등을 바라본다. 오늘날 소위 586세대가 산업화 세대 이후로 물려받은 역사와 스스로의 네트워크에 근거하여 상층을 과잉 점유하게 되었다는 문제의식이다. 기성세대의 네트워크와 이해관계가 ‘세대 간 격차'를 강화했으며, 동시에 '동일세대 내의 격차'도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세대론의 함정
최근 KBS 시사기획 창이 한국리서치와 함께 조사한 <공부방 계급론> 이란 통계가 있었다. 해당 조사는 청년들에게 학창 시절에 공부방이 있었는지 여부를 물어 상/중/하 층을 나누고 질문을 던졌다. 삶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 대한 상층과 하층의 답변은 극명하게 갈렸다. 이러한 데이터에 근거했을 때 이런 상이한 청년들을 하나의 세대로 묶어서 일반화 할 수 있을까? 과연 하층 청년들의 목소리가 우리 공론장에서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가? 언론이 소위 '공정 여론'이라고 언급하는 청년세대의 여론이 '전체 세대'를 대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목소리의 크기가 곧 권력이 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보다는 강자가, 교섭권을 확보 한 이익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자유로운 의견 표출에 적극적이고 친화적인 중상위층이 그렇지 못한 계층보다 <과대대표> 되는 경우가 발생함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성' -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고 해서 유사한 사회적 속성과 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확답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청년세대가 사회구조적 위치, 일상의 경험, 의식과 가치, 세대적 동류의식 중에 어느 하나라도 똑같아서 <사회적 세대> 혹은 <역사적 세대>라고 규정될 수 있는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만 하더라도 내가 왜 2001년에 태어났다고 MZ세대에 묶여야 하고, 소위 이대남 다수 여론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내부자인 것처럼 분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역사가 미래로 더 전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현대의 세대론에 깊은 영감을 준 예술사가 빌헬름 핀더는 1926년에 출간한 <유럽 예술사에서 세대의 문제>에서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성’ 또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중대한 화두를 던졌는데, 그가 주목한 것은 동일한 시점에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데서 생겨나는 다면적인 역동, 마치 다성음악과 같은 역사의 리듬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옛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는 직선적, 법칙적 과정일 수 없다. 공존하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문제와 해법, 그 담지세력들의 경합이 역사를 만든다. 윗세대의 양보라는 온정적 윤리학, 세대교체라는 공허한 생물학으로 미래는 오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의 주역들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깃발에 새겨 발을 쿵쿵 구르며 행진할 때 낡은 질서가 비로소 흔들릴 것이다. 멀리서 땅의 진동이 들려온다.
그러므로 "세대론"이라는 울타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전혀 이질적인 20대와 30대 집단을 하나로 묶어서 MZ세대 담론을 만들어 낸다던지, '역사의식이 부족한 20대' 혹은 '모든 걸 독점하는 86세대' 같은 특정 세대에 대한 혐오적 정서를 정치적 구호로 분출하는 행위가 적어도 <사회학적 데이터 분석>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회적 합의, 전환적 공론
‘공정’은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어떤 경쟁의 룰을 마련할 것이며, 또 경쟁 이후에는 어떤 피드백을 해야 할지에 대한 ‘시스템을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다. 정해진 답은 없다. '경쟁적 능력주의'와 '형식적 평등주의'라는 두 가지 기준 사이에서 부문별로 타협해 나가야 할 문제이다. 또한 불평등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 '세대'의 맥락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시각은 타당하나, 일반화된 세대론적 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이념적/정파적 쟁점화만 낳는 건전하지 못한 논의라 할 수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의 무너진 사다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건강한 경쟁과 포용적 안전망을 갖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런 쟁점에 대해 시민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공론장을 열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저널리즘과 정당정치가 서 있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청년세대, 다음 세대가 정치의 시대교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세대론에 입각한 권력의 교체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다음 시대의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는 유능한 정책과 대안을 공론장에서 빚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