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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익 Feb 20. 2022

숙련 해체의 시대.. 노동을 둘러싼 솔직한 질문들

전혜원,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고,




숙련 熟鍊 명사; 연습을 하여 능숙하게 익힘.


"숙련이 해체되고 있다."


전혜원 <시사IN> 기자는 플랫폼 노동부터 호봉제에 이르기까지, 노동 현장의 아홉 가지 풍경을 들여다본다. 책은 모두가 익숙하게 접해온 이슈와 갈등을 재조명하면서도 언론과 정치권이 비추는데 미진했던 이면(裏面)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노동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고 있는가?"

 


노동시장의 사분면


전통적인 노동관계는 '고용 여부'를 기준으로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로 나눌 수 있다 (노동시장의 이분면). 그런데 오늘날 노동시장에는 '종속성 여부'라는 새로운 축이 하나 더 생겼다 (노동시장의 사분면).

자영업자이면서도 사실상 프랜차이즈에 고용된 '종속적 자영업자'가 존재하고, 개인사업자 신분이면서도 임금 노동자의 성격을 갖는 '자율적 임금노동자'가 존재한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운영하는 점주는 자영업자이지만 사실상 본사로부터 고용되어 '표준화된 숙련'을 제공받는 노동자에 가깝다.


배달 노동자인 '쿠팡 플렉스'는 플랫폼 기업에 고용된 임금 노동자의 성격을 갖지만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들은 기존 노동법 체계에 느슨하게 적용되거나 소속되지 못하는 새로운 주체들이다.


밀려나는 자들을 위한 전환


이러한 변화를 촉발한 계기는 '기술 혁신'이다. ICT 기술 등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기업은 숙련이 필요 없는 업무를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러한 ‘숙련의 해체'는 타다 사건부터 톨게이트 수납원에 이르기까지, 각종 노동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경쟁력에 밀려난 사람들은, 그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약한 고리에 느슨히 연결됨으로써 또 다른 불안정에 시달리게 된다. 밀려난 노동자가 프랜차이즈 자영업에 뛰어들고 그조차 안 되면 쿠팡 운송업에 뛰어드는 형국이다.


저자는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의 현장에 주목한다. 기술 혁신에 따른 사회의 전환은 객관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밀려난 사람들의 현실을 당연한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일자리는 곧 사람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바람직한 전환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공채 공화국,


오늘날 청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할 자격(숙련)'보다 '들어갈 자격(공채)'이다. 인국공 사태에 많은 이들이 분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성과는 어떤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일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 안에 소속되는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바깥의 노동자들은 적정한 보상과 안전망을 제공받지 못한다. 그러니 수많은 청년들은 입성을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고, 승패는 이후 삶을 결정하는 평생의 격차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질문은 성 안과 밖을 나누는 ‘노동 이중구조' 자체가 되어야 하고, 정규직에게 돌아가는 '공채 지대(rent)의 추구'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되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진보는 재벌 대기업의 독점이윤에 대해 비판해왔듯이 노동시장 내부의 기득권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연공급제는 지속 가능한가?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러한 노동 이중구조의 시스템적 기제가 되는 ‘연공급제’에 주목한다. 호봉제로 불리기도 하는 연공급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의 숙련이 증대될 거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세대 구간별 노동자의 생산성을 고려했을 때나, 숙련이 해체되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연공급제를 폐지하고 대신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성과를 메기는 직무급으로의 전환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조는 연공급제를 폐지하면 하향 안정화를 촉발할 거라 반대하지만, 노조 스스로가 공적으로 내세우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와 연공급제는 함께 갈 수 없다. 연공급제 대신 직무급제에 근거한 기준을 세워 어느 기업에서 일하든지 '이 정도 숙련이 필요한 일을 하면 얼마나 번다'라는 기준이 있다면,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도 사다리를 타고 옮겨갈 수 있다.


그렇게 누구든 숙련을 쌓고 필요하면 직장을 옮겨 다니며 사회 안전망에 소속된 노동시장이, 적어도 지금과 같이 ‘평균적으로는 높은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과 나머지로 구성된’ 노동시장보다는 바람직할 것이다.


진보가 던져야 할 질문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저자 스스로가 진보언론에 종사하는 저널리스트이면서도 그간 진보언론이 들춰보지 않은 지점까지 질문을 끌고 갔다는 것에 있다.


예컨대 '비정규직 정규직화' - '주휴수당' 등은 좋은 취지의 정책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진보는 허울 좋은 대안이 사회 전체에 적용했을 때의 효과에 대해 실질적인 검토를 하는데 미진했다.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연공급제를 비롯한 진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기를 꺼려왔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관한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장 정확한 답을 제시하진 못할지라도 정확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회적 토론과 합의의 장을 만들어 가야 한다. 노조는 울타리 바깥의 노동자들도 포용하는 사회적 연대를 골몰해야 하고, 정치권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구조개혁에 관한 합의점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대목에서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우리 공론장이 다뤄야 할 질문들을 폭넓게 담고 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저널리즘의 본분이라 믿는 저자의 시각이 잘 반영된 '좋은 르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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