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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dys Apr 04. 2021

명랑한 은둔자의 통화 준비물


“령아 잘 지내?” 오랜만에 미진(가명)이에게 카톡이 왔다.


미진이는 나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로 우리는 매일 급식실을 같이 뛰어갔고, 하굣길을 함께 했으며 ‘콩 한쪽도 나눠먹는 우정을 간직하자’는 뜻의 10년 차 빈 팅구들(bean friends) 멤버다. 미진이와 나,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 모두 장난기가 많아 우린 매일 턱이 아플 정도로 웃으며 10대의 마지막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거 같다. 덕분에 그와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쭉 친하게 지내며 자주 소통했고 어색할 게 없었다. 그가 일본에서 일을 시작하며 얘기하는 빈도가 줄어 몇 개월에 한 번씩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모처럼 미진이와 연락이 닿았고, 우린 본격적인 근황 토크를 하기 위해 통화할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그런데 약속했던 그 날의 그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얘기하는데 서먹서먹하면 어떡하지? 침묵이 흐를 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분위기가 어색하면 어떡해? 난 재밌는 얘깃거리가 없는데… 나를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등등. 고작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전화 한 통 하는 건데도, 온갖 걱정이 꼬리의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예전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언젠가부터 나는 어색한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며 피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물론 피한다고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부자연스러움이 부각됐다. 문제는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색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래 알고 지낸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도.


그와 전화하기 30 , 이대론 안될  같아 급히 종이에 흥미로울만한 근황  개를 적었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근황 토크 리스트에는 이직한 이야기, 나와  았던 상사 욕하기, 연애하다 헤어진 이야기, 진로 고민, 재테크  적당히 얘기할만한 토픽을 골라 적었고  토픽에 맞는 자극적인(?) 얘깃거리를 대략적으로 생각해놓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심이 됐다. 드디어 전화하기로  저녁 8.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전화를 받는다. “ 미진쓰~ 오랜만이야!” 짐짓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색한 첫인사다. 등에 식은땀이 쫙하고 흘렀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시작하고 나니 내가 걱정했던 어색함과 서먹함은 느낄 틈도 없이, 둘 다 웃고 얘기하느라 오디오가 빌 틈이 없었다. 통화 전 걱정하며 적어놨던 근황 토크 리스트가 무색하게 대화는 매끄럽게 진행된 것이다. 미진이에게 나 사실 너랑 오랜만에 통화해서 어색할까 봐 근황 토크 리스트도 적었다? 하고 고백하자 그는 야 너는 무슨 그런 걸 적냐, 별 걱정을 다한다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게.. 하고 머쓱해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두 시 반. 무려 4시간 30분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우린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 다음을 기약하자며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끊은 . 괜한 걱정을 했던 스스로에 대한 민망함과 무사히 통화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음번 그와의 통화에선 괜한 걱정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 해본다. 하지만 진짜로 통화 날짜를 잡는다면? 나는  몰래 근황 토크 리스트를 적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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