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첫 아르바이트, 그 설렘과 씁쓸함에 관하여
스무 살 겨울이었다. 두 번째 수능을 끝낸 나는 자유와 해방감을 즐길 틈도 없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었으니 용돈과 생활비 정도는 알아서 벌어야겠지. 부모님이 강요한 건 아니었지만 집안 형편을 보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틈만 나면 알바몬, 알바천국 같은 채용 사이트를 뒤적였다. 당시 시간당 최저시급은 4천 원이었고 나는 왕복 버스비를 고려해 시급 4,000원과 4,200원짜리 알바를 저울질하며 표류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채용 사이트를 보던 어느 날 New 뱃지를 단 새로운 채용 공고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시급은 5천 원이 훨씬 넘었고 근무 환경도 좋아 보였다. 영화관 아르바이트였다. 그곳은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바로 알만한 대기업이었는데, 높은 시급도 흥미로웠지만 ‘상상 그 이상의 감동’을 함께 실현할 사람을 찾는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영화도 무료로 볼 수 있다니! 근사할 거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두근거렸다. 왠지 저곳에서라면 풍부한 영화 지식도 쌓을 수 있겠지.. 란 생각까지 미치자 뭔가에 홀린 듯 바로 이력서를 작성했다. 가장 잘 나온 증명사진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뒤 서류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 면접. 면접 당일, 나는 검은색 코트와 청바지, 그리고 아이보리색 스니커즈를 매치했다. 패션의 F도 모르는 스무 살이 입을 수 있는 가장 단정한 차림이자, 꼭 합격을 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옷차림이기도 했다. 도착하니 그곳에는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쓱 훑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장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검은색 면접 복장을 갖춰 입고 7cm가 넘는 하이힐을 신은 사람 등 다들 정갈한 차림이었다. 과연 대기업 아르바이트는 다르구나 생각이 들었다. 멋진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 사이, 너무 캐주얼한 복장으로 왔나 싶어 살짝 주눅이 들기도 했던 거 같다.
면접에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었지만 면접관들의 표정을 보니 무난히 잘 넘긴 거 같았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 뒤. 나는 마침내 아르바이트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 합격 소식만큼이나 설레던 날이었다. 일개 아르바이트지만 마침내 나도 대기업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가만히 있어도 슬며시 웃음이 났다.
첫 출근을 앞두고 출근 준비물에 대한 안내를 받아보니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았다. 검은색 구두, 살색 스타킹, 빨간 립스틱, 머리 망, 실핀, 헤어젤 등등. 이 모든 걸 사려면 최소 3~5만 원의 돈이 필요한 셈이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인데, 그 돈을 벌기 위해 또 돈을 써야 하다니. 아깝지만 그간 아껴둔 용돈을 털어 지하상가에서 가장 저렴한 구두 한 켤레와 빨간색 립스틱을 샀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출근뿐이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의 일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각종 할인카드며 운영 정책, 상영 스케줄 등 외워야 할 게 많았다. 여러 시험을 통과하는 자만이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치열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특수로 영화가 매진되는 일도 허다했다. 어떤 날엔 팝콘과 콜라로 범벅된 220석 영화관을 5분 안에 혼자 치워야 했고 시재금이 안 맞을 때면 개인 사비로 모자란 금액을 메꾸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고작 6시간 일하는 아르바이트인데도 출근 전후로 준비할 것도 많았다. 머리를 헤어젤로 발라 깔끔히 정리하고, 유니폼을 갈아입고, 스타킹을 신고, 구두로 갈아 신는 것까지. 매니저에게 단정함 검사를 받아야 업무에 투입이 가능했으므로 라커룸에 최소 30분은 일찍 도착해야만 했다. 어쩌다 출근 준비를 하다 1분이라도 지각을 할라치면 30분어치의 시급이 가차 없이 깎였다. 일이 끝나면 또 옷을 갈아입는데 30분. 퇴근 후 헤어젤로 떡칠이 된 머리와 빨간 립스틱이 번져 못생긴 입술, 팝콘 냄새가 짙게 밴 유니폼은 엉망진창이었다. 다른 곳보다 1천 원이나 높았던 시급은 이 모든 고충을 포함하는 금액이었음을, 스무 살의 나는 몰랐다.
하지만 어디에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기 마련인 법이다. 바쁜 만큼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빨라졌고 일이 손에 익으며 점점 재미를 느꼈다. 근무하는 포지션마다 1~2명씩 무전기를 쓰며 소통했는데, 이 무전기로 채널을 돌려가며 다른 동료와 업무 공유를 하는 것도 신기하고 재밌었다. “6층 플로어, 송신해주십시오.”라고 무전기를 통해 말할 때면 뭔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이 끝나면 입사 동기인 언니, 오빠들과 같이 저녁과 술을 먹으며 노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쉬는 날엔 영화를 보기 위해 다시 영화관으로 향하는 열정 아르바이트생, 그건 바로 나였다. 동기들과 하루하루 우정을 쌓으며 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주변에서 “너 어디서 일해?”하고 물으면 “나? 영화관. 엄청 재밌어!”하고 답했다. 대기업 정규직 직원이라도 된 듯, 마치 기업이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듯 회사에 대한 자긍심과 애사심을 내보였다. 당시 영화관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열심이었던 것도 같다.
이듬해 2월 말 나는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학교를 다니려면 아르바이트를 주말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니고 있는 영화관 아르바이트도 주말 조로 일할 수 있었지만 그러려면 몇 개월 이상의 경력자이거나 스케줄을 짜는 매니저와 사이가 좋아야 했다. 나는 겨우 2~3개월 차 '병아리 미소지기'였으므로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관의 일도 재미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아서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다시 알바몬을 뒤적이며 아르바이트를 새로 구하는 것도, 4천 원짜리 일을 다시 하는 것도, 면접을 보고 새로운 곳에 익숙해지는 것도 왠지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평일 낮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을 하는 것도 우선이겠지만 용돈도 벌어야 하는 생계형 아르바이트생이던 나는 알바와 학업을 병행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으므로, 그래야만 했다.
2010년 3월 2일, 드디어 대학교 첫 수업. 첫 수업은 전공필수 과목인 경제학 원리(1) 수업이다. 무려 1교시 수업이었다. 고등학교 때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도 무리 없었던 걸 생각하곤 대학교의 아침 수업을 만만하게 봤던 신입생 정 씨. 시간표 짜는 요령이 없어 유독 1교시 수업(오전 9시)을 많이 잡았던 1학년 1학기였다.
1교시부터 쉼 없이 수업을 듣고 저녁 6시에 수업을 마치면 두 시간 거리의 영화관에 알바를 하러 달려갔다. 자연스럽게 과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은 멀어졌다. 대학 동기들 사이에선 ‘학생식당 밥 한 끼조차 같이 먹기 힘든, 항상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 8시 반부터 시작된 일은 마지막 상영하는 영화가 끝나는 새벽 2~3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집에 가서 씻고 잠들면 3~4시. 다음날 다시 1교시 수업을 들으러 학교를 가기 위해선 아침 7시에는 집을 나서야 하는 고된 스케줄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다행인 건 바쁘게 산다는 것이 곧 나의 쓸모를 세상에 증명하는 것 같아 때론 뿌듯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뿌듯함이 나의 피로감을 덜어주진 않았으므로 나는 종종 학교 갈 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를 못 들었고 늦잠을 자 종종 수업을 빼먹었다. 제시간에 수업에 가더라도 졸기 일쑤였던 나는 부모님과 교수님께 죄송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반복했고 그 결과 1학년 1학기, 한 개의 F와 C0가 난무하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 후회는 없었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한 친구는 아등바등 사는 나에게 말했다. 차라리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성적 장학금을 타면 되지 않겠느냐고. 친구가 나를 생각해주는 말이란 걸 알면서도 '나도 그러고 싶어!'라는 항변이 목 울대까지 차올랐다. 그에게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당장 바꿀 수 있는 현실인 것도 아니므로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다음 날도, 모레도 방과 후 영화관으로 향하며 문득 생각했다. 5천 원 짜리 시급의 세련된 노동에 대한 대가는 성적표의 F라고, 몇 백만 원짜리 비싼 인생수업이라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안다. 그때의 세련된 노동은 생각만큼 세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시급 5천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고급 영화 취향이 생기진 않는다는 것을 안다. 가끔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도 어쩔 수 없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정말 많은 사람을 얻었던 사실을. 동료에게 인정을 받으며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을. 또한 인간관계에서 종종 쓸모가 있던 쿠션 멘트도 배웠다는 것을. 어떤 영화가 내 취향인지 정도는 알게 됐다는 것도. 살면서 F학점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이제는 정말 잘 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같이 병행하며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언제나 당신의 앞길이 평안하길 응원하겠다고. 성적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당신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애쓰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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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