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네 살, 엄마가 재혼했다.
학교에서 오늘 급식은 무엇이 나올지, 이차방정식의 x값은 도대체 어떻게 구하는 건지, 인생은 왜 늘 이렇게 고달프고 힘든 건지 고민하기도 바쁜 사춘기 소녀에게 엄마의 재혼이라니. 마치 또 하나의 시련이 주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사춘기나 동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엄마가 한번 결정한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엄마는 새 가족이 될 인물과 대면식 자리에 언니와 나를 초대했고, 처음 본 그는 영락없는 중년의 아저씨 모습이었다. 아저씨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하얗게 웃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종종 아저씨와의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몇 번 밥을 같이 먹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저씨를 향한 어색하고 낯선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와 나란히 서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하도 어색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서로가 안면을 익혔을 즈음 결혼식장이 예약되고, 웨딩드레스 촬영 일정이 잡혔다. 처음 보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의 모습. 낯설었다. 이혼 후 두 딸을 홀로 키우며 힘들었을 엄마는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행복해 보였다. 그 옆에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가 함께였다. 엄마와 그를 위한 웨딩 촬영이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언니와 나도 졸지에 공주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중세시대에도 안 입을 법한 올리브색 드레스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영 어색했다. “좀 자연스럽게 웃어보세요~”라는 포토그래퍼의 주문에 억지 일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새 가족사진' 촬영을 마쳤다. 기운이 빠졌다. ‘이런 걸 찍는다고 가족이 되나?’
어쨌든 결혼과 동시에 엄마는 그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그리고는 새로운 집으로의 이사 계획을 선언했다. 이사 갈 집은 방 세 칸짜리의 작은 빌라였다. 신축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깔끔한 입구와 집 다운 집이라는 느낌을 풍기는 아늑한 빌라. 십몇 년 남짓한 인생이었지만 최초로 내 방이 생겼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새로 이사 간 곳에서는 내 방뿐만 아니라, 그의 방도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런 집에서라면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다.
새 가족사진도 찍고, 한 지붕 아래 “새 가족”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간의 호칭이 애매했다. 그는 우리를 다정하게 이름으로 불렀지만 10년 가까이 아버지 없이 자라왔던 나는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무척 애를 먹었다. 그것은 언니도 마찬가지였는데, 우리는 어색한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암묵적으로 그를 낯선 이처럼 대하기로 했다. 게다가 생물학적 아빠가 아닌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건, 그 당시로서 어딘가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다행스럽게도 사춘기라는 것은 예민하고 까칠한 모든 것을 포용받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하나의 방패 같은 것이어서 어른들에게 주는 상처도, 매일 같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곧잘 용서가 되곤 했다. 물론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않고 “아빠라고 불러~”라며 언니와 내게 매일 같이 부탁했다.
그는 언니와 나에게 종종 갖고 싶은 물건을 사주거나 용돈을 주며 친해지려는 노력을 보였다. 특히 나에게는 조금 더 친절한 편이었는데, 내가 막내라서 그런 건지 애교가 조금 더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언니보다 조금 더 사교적이라서? 어쨌든 나에게는 용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곤 했다. 흰머리 한 가닥을 뽑을 경우, 한가닥에 용돈 500원으로 계산해 주는 형식의 용돈벌이였다. 즉 흰머리 스무 가닥을 뽑으면 용돈 만원을 벌 수 있었던 이 아이디어는 기발하게도 용돈이 부족한 자와, 친해지려는 자 모두의 이익을 충족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한 가닥에 500원이라니, 이 세상 어느 아르바이트보다도 고수익 알바가 아니던가.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그의 흰머리를 뽑았다. 흰머리에 한 가닥에 컵떡볶이가 한 컵이니까, 열 가닥이면 동인천 디스코팡팡이 한 번이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용돈벌이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낯설게 느껴지던 그와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평소 말도 잘 섞지 않던 그. 듬성듬성 흰머리가 나있는 그의 머리를 마주하자 왠지 친근한 모습이 느껴져 애잔한 마음이 든다. 어쩌다 그는 50도 안된 나이에 이렇게 흰머리가 세었을까. '우리 엄마와의 재혼이 그에게 흰머리를 더 가져다준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그와 친해질 마음까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더도 말고 내가 정한 필요한 금액만큼의 흰머리만을 뽑았다. 딱 만원만큼의 스무 가닥. 그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지 말자는 나름의 규칙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이후로도 그와 나는 종종 흰머리 용돈 벌기 거래를 통해 약간의 친밀감을 쌓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왠지 돈에 굴복하여 친해지는 것은 사춘기 소녀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얇실하게 용돈 버는 방법을 알아채 영리하게 이용하는 돈이 필요한 10대일 뿐 그와 친해지기에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가 친해지는 일은, 내가 그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 같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의 흰머리는 더이상 뽑아내기에 너무 많이 세어버렸다. 나는 그의 흰머리를 한가닥에 500원을 받고 뽑아주지 않을 뿐더러 그도 나에게 용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아빠라는 단어를 가까스로 꺼낼 수 있었던 나에게, 그는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10대에 보았던 그의 흰머리는 20대의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하얀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어느샌가 한 지붕 아래 '진짜 가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함께 살아서 가족인 게 아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가족.
자주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 좀 끊으라’며 잔소리하는 딸이 되어 있는 나와, 나에게 흰머리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는 대신 종종 용돈을 달라고 하는 그. 우리는 어느새 친근한 아빠와 딸이 되어 있었다. 그는 또다시 희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