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요가는 육아요가 아니겠는가
아침 일곱시 삼십분. 눈이 번쩍 떠졌다. 확실히 숙소를 옮긴 이후로 밤에 깊은 잠을 잔다. 아직 옆에서 한창 꿈나라인 깍두기를 확인하고 잠시 눈만 감고 있어야지 했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났다. 침대에서 떨어진 깍두기가 엉엉 울고 있었다. 에고 내가 너무 방심했나 보다.
사실 어제부터 깍두기의 감정선이 심상치 않았다. 엄마인 내가 내심 당황할 정도로 처음 겪어보는 깍두기의 반응들. 말 수가 적어지고 대답을 안하고 어딘가 우울해보였다. 깍두기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하는 편이 아니어서 이번 여행도 사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보름을 넘기는 이 시점에 태어나서 처음 보게된 그녀의 표정들. 나는 적잖이 놀랬고 원인을 고민했고 조심조심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깍두기는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수라지 삼촌도 만나기 싫고 엄마랑만 있고 싶다고 했다.
도착한 첫 주는 얼떨결에 지나갔고 둘째 주는 모든게 신기하고 재밌었다면 셋째 주를 향해가는 지금, 익숙한 것들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이해할만한 마음 상태였다.
그래도 일어나더니 캐리어와 각종 물건들을 놀잇감 삼아서 한참을 놀고 방에 남아있던 크로아상 당근케익 망고와 귤들을 아침 삼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옴샨티옴 슈밤선생님 오전 수업에 갔다.
90분간의 하타요가 수업. 스트레칭과 변형된 수리야 나마스카라 5회 그리고 아사나들로 진행되는데 보통은 차크라산(wheel pose)과 시샤르사나(headstand)로 마무리된다. 일요일도 쉬지 않고 수업하는 열정 선생님, 나이로는 어린 남동생 벌인데 얼마나 성의 있게 매동작 핸즈온을 해주는지 그로 인해 내 한계 지점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신기한 경험들을 했다. 나 역시도 가르치는 사람이어서 배우면서도 그의 티칭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오전에 90분 집중해서 수업을 받고 나면 몸이 너무나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이대로 리시케시에서 6개월만 온전히 수련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슈밤선생님한테 깍두기가 너무 심심해하는데 잠시 열흘이라도 다닐만한 유치원이 없을까? 물으니 있다고 당장 가보자고 했다.
정말이지 5분 정도 걸어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현지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같은 공간이 있었다. 깐깐해보이는 여자 원장님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관광비자만으로는 서류가 부족해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쩝. 어쩔 수 없지.
슈밤선생님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헤어진 뒤에 깍두기를 데리고 리틀붓다 카페로 갔다. 요즘 내리 이 식당에서 이탈리안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다. 맛있다! 오늘은 퀘사디아와 토마토파스타 그리고 깍두기에게 파인애플 쥬스를 시켜주었다.
나는 따님의 눈치를 살살보며 오늘도 쿠쉬언니네 놀러 가자고 했다. 수라지 삼촌이 태워주러 왔는데 시큰둥 쳐다도 안보는 깍두기. 삼촌의 갖은 애교도 통하지 않았다.
쿠쉬 언니네 또! 예고도 없이 찾아가기에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간식을 샀다.
수라지는 쿠쉬네가 사는 쉬바난다 아쉬람에 우리 모녀를 떨궈주고 갔다. 이제 언니네가 익숙해진 깍두기는 2층으로 다다다다 올라가서는 쿠쉬 언니와 러끼오빠가 있는 집안으로 쏙 들어갔다. 뒤따라 올라갔더니 이미 손잡고 나오는 아이 셋. 그리고 이어 나오는 그 집 큰딸 무스깐과 엄마 라즈니....아이고 이게 왠 실례인가 싶은데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 같았다.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마치 너희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온 가족이 환하게 웃어주었다.
방의 한쪽면이 부엌이었는데 엄마 라즈니가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금세 간식거리들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2층 집안과 복도에서 한참을 놀았고 나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엄마 라즈니와 내가 아는 힌디어를 총동원해서 대화를 나눴다. 참 아이같이 해맑은 그녀. 아이들의 엄마인 그녀가 좋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 놀기 시작했다.
나보고 배드민턴을 같이 치자는걸 괜찮다고 거절하고 앉아 구경을 했다. 이웃집 십대들은 유일한 놀이와 다름없는 배드민턴을 매일 치는지 내가 볼 때 실력이 우리나라 국가대표급이었다.
세시간은 족히 놀고 우울감이라고는 온데간데 사라진 깍두기와 우리의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함께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들에게 영상 메시지가 오고 또 영상으로 답장을 쓰고...기다려주고 내 빈자리를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그러한 기쁨과 감사를 처음 겪어보는 깍두기였다.
수라지 삼촌은 깍두기 우울하면 안된다고 본인 강아지 그래미를 우리 방에 두고 갔다. 강아지와 노느라 한참 행복한....
상당히 지쳐 보이는 깍두기를 또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1층으로 내려가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 물 끓이는 방법이 있겠냐고 물었더니 전기포트를 선뜻 빌려주셨다. 우와!! 한국을 떠날때 혹시나 싶어 공항에서 사온 순한맛 진라면과 누룽지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멸치반찬과 김치 한팩. 깍두기는 오랜만에 먹는 한국의 맛에 말을 잃고 허겁지겁 잘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곤히 자는 밤.
열여섯번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