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본고장, 영국 바비칸 센터에 오른 창극 ‘리어’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도시 런던. 2024년 가을 이곳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레이너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등 고전 작품들이 새롭게 해석되어 동시대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 2024년 10월 3일부터 6일까지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유은선)의 ‘리어’가 공연되었다. 물의 철학을 근간으로 한 노자 사상을 큰 줄기로 삼은 작품은, 과거 습지였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수로 위에 조성된 바비칸 센터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판소리라는 전통 형식에 현대적인 무대 연출을 결합하여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공연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이 영국에 스며드는 상징적인 순간을 만들어 냈다.
2022년 첫선을 보인 창극 ‘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극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맡았다. 연극·뮤지컬·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정영두가 연출과 안무를, 창극 ‘귀토’와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한승석이 작창을 담당했으며,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을 맡았다. 원작의 분량이 방대한 만큼, 내용과 주제를 압축했음에도 작품의 러닝타임은 3시간 10분에 달했다.
‘리어’는 한국에서 초연과 재연을 거치며 호평받은 작품으로, 런던에서도 물을 활용한 독창적인 무대가 주목받았다. 출연자들의 열정적인 연기 역시 많은 찬사를 받았으며, 여러 매체와 온라인 리뷰에서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영국의 웹매거진 ‘디 아츠 데스크’의 헬렌 호킨스는 “출연진의 기량과 무대 연출이 조화를 이룬 점”을 높이 평가하며 프로덕션의 완성도에 찬사를 보냈다. ‘런던 컬처리스트’의 데이비드 역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도 원작의 핵심 요소를 잘 살린 점”을 언급하며, 셰익스피어를 온전히 이해한 크리에이티브 팀의 역량을 극찬했다. 특히, 물의 위험성과 불편함에도 무대 연출을 자연스럽게 소화한 출연자들의 공로를 강조했다.
‘텔레그래프 지’의 이반 휴이트는 “리어가 딸들을 물리치는 마지막 전투 장면이 경이롭다”고 평가했으며, ‘더 스테이지(The Stage)’의 아만다 홀러웨이는 소리꾼 김준수의 처절한 연기를 인상 깊게 묘사하며 “그의 캐릭터 변화가 돋보였다”고 말했다. ‘리뷰 허브(The Reviews Hub)’의 피비 태플린은 “김준수가 모든 감정을 몰입감 있게 표현했다”고 칭찬하며 “연기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면 너무 늙어서 연기할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 전문가 조나단 베이트의 말을 인용해 “리어 역에 젊은 소리꾼을 캐스팅한 것이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표하는 젊은 단원 김준수(리어 역)와 유태평양(글로스터 역)의 연기와 더불어 작품 속 모든 배역이 각자의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소화해 냈다. 리어의 딸 거너릴과 리건을 연기한 이소연과 왕윤정은 각각 독기 어린 탐욕스러운 딸들의 모습을 극대화하여 리어의 광기를 부추겼다. 코딜리어와 광대 역의 민은경도 완전히 다른 두 역할을 입체적으로 구현해 냈다. 광대는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며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고, 이를 통해 빠르고 경쾌한 장단의 변주도 보여주었다. 글로스터의 야심 찬 서자 에드먼드를 연기한 김수인 역시 존재감 있는 연기를 펼치며 무대에 활기를 더했다.
다만, 런던에서 한국어로 공연된 작품은 영어 자막을 통해 해외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는데, 함축적인 한자어나 운율을 맞춘 한국어 단어의 의미를 두 줄의 영어 자막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글로스터가 산통을 흔들어 뽑은 ‘산지박(山地剝)’은 주역(周易)에서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영어 자막에는 단순히 ‘San-Ji-Bak’이라는 음역으로 표기되었다. 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상판대기’가 ‘face’로 번역되는 등 한국어의 세밀한 감정이나 발음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영어 자막에 담아내기는 어려웠다.
공연 중 관객들이 박수를 언제 쳐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감정이 폭발하는 리어의 독창에서는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때 리어의 슬픔과 분노는 극도로 고조되었고, 관객은 언어를 넘어 그의 감정에 깊이 공감했다. 북, 가야금, 거문고 등 외국인의 시선에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국악기들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커튼콜에서 연주자들이 악기를 들고 인사할 때 객석에서 큰 환호가 쏟아졌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객석 앞줄에서 DSLR 카메라로 출연자들을 촬영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이 공연을 위해 런던에 방문해 전 회차를 모두 관람한 한국 팬들이었다. 공연예술에서 관객은 공연의 일부이며, 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다. 객석의 분위기가 공연의 기억을 좋게 만들 수도, 그렇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한국 팬들이 영국까지 와서 응원한 덕분인지, 객석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번 바비칸 센터에서의 공연은 가장 한국적인 소리를 전 세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식 오페라’로 불리는 창극을 글로벌 무대에 선보이는 소중한 기회였으며,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감정을 전달하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 장르에 대한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며, 이러한 지원이 있을 때 세계 무대에서 창극의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